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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Oct 07. 2024

살림과 평화

그래서 그런 거구나

2024. 10. 4.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오늘 진짜 평화로운 것 같네."

"그래? 각자 할 일을 맡아서 하고 있으니까 그런가 보다."


빨래를 개다 말고 아드님이 한 말씀하셨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평화로운, 살림하는 일요일 아침이었다.


"일요일이라 할 일도 많이 없는데 뭐 하지?"

딸은 늦잠을 실컷 자고 일어나서 다짜고짜 한다는 소리가 저거였다.

사방 천지가 다 할 일 투성인이데 저게 무슨 소리람?

"그래? 엄만 할 일 많은데 그럼 집안일 좀 할래?"

기회는 이때다 싶었다.

평소에도 부탁을 하면 잘 들어주는 남매라 종종 나는 각자 살림 분담을 시키곤 한다.

"결혼 안 할 거라며? 혼자 살 거라며? 혼자 살면 어차피 혼자 다 해야 돼. 살림도 어려서부터 미리해 봐야 나중에 편해. 지금 나는 혼자 산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다 해 봐. 엄마가 있어도 없다고 생각해. "

라는 말로 합리화를 하면서 말이다.

"심심하면 설거지할래?"

식기세척기가 있지만 내 의지로 산 게 아니라 손이 가지 않아 나는 그냥 직접 설거지를 하고 있다.

"좋지."

한 번도 거절을 하는 법이 없으시다.

아드님은 아침부터 공부씩이나 하겠다고 노트북을 펼친 지 오래였고 나와 제 누나의 대화를 들었는지 듣고 싶지 않은 건지 우리가 하는 말 같은 것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같이 사는 집에서 우리만 집안일에 매달릴 수는 없었다.

우리끼리만 다 하면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아드님이 얼마나 서운해할까 하는 생각이 미침과 동시에 건조대에 있던 빨래를 걷어왔다.

평소에는 건조기에 들어 있는 빨래를 아들에게 꺼내 달라고 하는데 이번엔 빨래 양이 적어서 굳이 건조기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자, 우리 아들. 여기 있어. 바빠? 좀 쉬어. 쉬는 김에 빨래 좀 개 줄래?"

다짜고짜 아들 앞에 빨래 뭉치를 내줬다.

"당연히 해야지."

라고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들은 작업에 돌입했다.

"근데 엄마, 이 많은 걸 내가 혼자 다 개야 해? 누나는?"

갑자기 누나 생각이 간절하셨나 보다.

"누나는 설거지했고 지금은 낮에 먹을 볶음밥 재료 준비하고 있어.(=누가 보더라도 이건 너한테 더 이득인 일이야. 누난 벌써 두 가지 일을 하고 있다고.)"

"아, 그래?"

사태를 파악하고 아들은 군말 없이 남은 빨래를 마저 갰다.

"우리 아들은 어쩜 빨래도 이렇게 잘 갤까? 잘했어! 이젠 제자리에 다 넣어놔야겠지? 어차피 네가 나중에 혼자 살면 너 혼자 다 해야 할 일들이야."

개었던 빨래도 다 정리하고 잠시 쉬더니 아들이 뜬금없이 말문을 열었다.

"근데 오늘따라 우리 집이 조용한 것 같네. 왜 이렇게 평화롭지?"

"평화로운 것 같아?"

"응. 조용하잖아."

"각자 자기 할 일 하고 있으니까 그런가 보다."

"정말 그렇네."

"이렇게 평화로운 일요일에는 구황작물에 녹차 라떼를 마셔 줘야겠지?"

나는 급히 물을 끓여서 새참을 준비했다.

고구마도 내왔다.

"얘들아, 새참 먹자. 먹고 또 살림해야지."

"엄마, 고마워요. 우리를 위해서 차도 타 주고."

"엄마가 고맙지. 너희 덕분에 엄마 일이 줄었잖아. 그래서 너희랑 차 마실 시간도 생기고. 집안일은 이렇게 같이 하는 거야. 알겠지?"

아직은 순진한(순진하다고 사료되는) 초등학생들, 녹차 라떼 잔에도 고맙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 어린이들이라니.


"우리 아들 딸 덕분에 일요일이 한가해졌네. 이렇게 평화롭게 아침을 보내니까 정말 여유 있고 좋다. 이따가 아빠 운동 끝나고 오면 생크림 만들어 달라고 하자. 살림의 마무리는 생크림 만들기니까. 그치?"

"그럼 되겠다. 오랜만에 생크림 만들자."

(많이 먹고 싶어서, 신선하게 먹고 싶어서) 평소 집에서 생크림을 만들어 먹는 편이라 시중에 나와 있는 휘핑크림을 구비해 뒀다가 한 번씩 그 양반이 전동 드릴을 이용해서(그런 거창한 공구로 생크림을 만든다는 게 좀 안 어울려 보이긴 하지만 효과는 아주 좋다)생크림을 직접 만들어 준다.

"이제 출근하면 또 바빠질 것 같으니까 오늘 만들어야겠다."

그 양반이 컴백을 하고 나머지 세 멤버가 할 일을 다 마친 후 예정된 스케줄대로(어쩌면 나 혼자만 계획한 스케줄대로) 생크림도 만들었다.


평화롭고 달콤하고 여유로운 일요일, 더 바랄 게 없었다.

사는 게 뭐 별 건가.

대단한 걸 기대하지 않는다.

만족스러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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