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에 할머니 집에 와서 콩 좀 주워라. 비가 계속 온다고 하더라. 할머니가 용돈도 줄게."
다짜고짜 외할머니는 손주들에게 미끼부터 덥석 던졌다.
"엄마, 할머니가 일요일에 와서 콩 주우라는데 갈 거야?"
아이들은 솔깃한 외할머니의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아니 뿌리치기 힘든 상황이었다.
용돈이 바닥나는 중이었고 그들은 여전히 사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은 것도 많은 어린이들이었다.
뿌리쳐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남의 일도 바쁘면 손을 넣어줄 수도 있는 마당에 친정 일인데 아니 가고 배길 수가 없었다.
이미 아이들은 잿밥을 겨냥하고 마음의 준비도 단단히 하고 있었다.(고 내 눈에는 보였다.)
"그래, 가서 할머니 도와주면 좋지. 할머니 혼자 하시려면 오래 걸리는데 그래도 우리가 가서 하면 더 빨리 끝나겠지?"
그리하여 일요일에 우리 세 멤버는 콩밭으로 출동했다.
올해는 서리태가 잘 안 여물어서 크기가 (비유가 좀 그렇긴 하지만) 쥐똥만 했다. 내가 알던 서리태가 아니었다. 하긴 시장에 나와 있는 농산물들은 고르고 골라 좋은 것들로만 상품성 있는 것으로 선별해서 내놓았을 테니까.
이상하게 올해 콩이 콩깍지가 말라 열리는 바람에 땅으로 많이 쏟아진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비효율적이고 가성비는 마이너스에 가깝지만 사람 손으로 일일이 하나씩 콩을 주워내야만 했다. 비만 안 오면 하루고 이틀이고 엄마 혼자서 주워도 되지만 비 예보가 있어서 엄마 마음이 다급해진 것이다. 비를 계속 맞으면 잘못하면 싹이 날 수도 있으니 기껏 힘들게 농사지어서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동화에서 보면 참새들도 출동하고 산짐승, 들짐승들이 출동해서 주인공을 많이 도와주기도 하더라마는, 난 동화 속의 주인공도 아니니 기대할 수도 없었다. 내겐 콩밭에서 하나씩 콩을 주워 나르는 게 현실이었다.
"콩 줍고 나면 할머니가 2만 원씩 줄게."
엄마는 대뜸 하루 일당부터 선포하셨다.
이는 어린것들의 사기를 북돋기에 충분했다.(고 지레 짐작 해 본다.)
"엄마 좀 쉬었다 해도 되지?"
작업을 시작한 지 겨우 10분이나 지났을까 싶은 시점에 아드님이 말씀하셨다.
"그래, 힘들면 쉬었다 해."
근로자에게, 특히 어린 근로자에게 너무 가혹하게 해서는 안 되겠다는 방침대로 아이들이 원하는 시간에 마음껏 쉬고 먹고 해찰을 하도록 내버려 뒀다.
"엄마, 봐봐. 내가 보석을 캤어!"
아드님이 또 말씀하셨다.
옛날에 땅콩밭에서 노란빛이 도는 돌덩이를 보고 호들갑을 떨며
"엄마, 내가 금을 캔 것 같아. 이제 우린 부자야!"
라고 말씀하시던 그날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물론 그것은 보석이 아님은 당연하다. 그것은 단지 평소에 못 보던 희한한 돌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래. 이제 콩 주워."
딸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데 아들은 콩 한 번 줍고 말 한 번 하고 콩 한번 줍고 새참 하나 먹는 느낌이었다.
"엄마, 여기 달팽이가 있어."
그래, 달팽이도 있겠지 뭐는 없겠어.
호랑이만 빼고 다 있을 것 같다.
나중엔 아예 제 누나 옆에 달라붙어서 일은 않고 수다만 떨고 있었다.
한참 콩을 줍고 있는데 갑자기 엄마가 말씀하셨다.
"할머니가 4만 원이 있는 줄 알았는데 보니까 3만 원밖에 없다. 둘이 만원씩 갖고 만원은 5천 원씩 나눠 가져라."
일당이 줄어든다는 청천벽력 같은 뉴스에도 아드님은 의연하셨다.
"괜찮아요. 안 주셔도 돼요."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나도 모른다.
그냥 받아서 이 엄마한테 고이 맡기는 방법은 왜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꽉 찬 하루는 아니지만 콩밭에서 아이들은 둘이 수다를 떨다가 외할머니와 오랜 만에 긴 얘기도 나눌 수 있었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모여서 종일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는가.
콩도 줍고 용돈도 받고 할머니 말동무도 해드리고 이렇게 보람찬 일요일은 근래에 없었다.
"우리 애기들이 와서 해주니까 얼른 했네. 할머니 혼자 하면 며칠 했을 텐데."
엄마도 비가 오기 전에 일을 해치워버린 것이 시원하신 모양이었다.
아들은 우리보다 30분가량 먼저 콩밭을 떠나 TV 앞으로 가셨다.
"합격아, 할머니가 3만 원 줄 테니까 2만 원은 너 갖고 만원은 동생 줘라."
과연 끝까지 콩밭을 지킨 자의 일당은 달랐다.
"아까 만 오천 원씩 나누라고 하셨잖아요?"
"네가 일 더 많이 했으니까 넌 2만 원 가져."
딸은 침묵으로 이를 수락했다.
딸이 아들에게 만원을 건넸다
"자, 용돈."
"어? 할머니가 분명히 15,000원 주신다고 했는데?"
아들이 뭔가 계산이 안 맞다고 느꼈는지 제 누나에게 이의를 제기했다.
"솔직히 네가 오늘 만원 어치 일을 했을 것 같아? 엄마가 보기엔 많아야 2,000원어치 정도 한 것 같다. 일 한 것보다는 먹고 수다 떨고 노느라 시간을 더 많이 쓴 것 같은데?"
라고는 나는 말하지 않았다 물론.
"우리 아들, 사람이 양심이 있어야지. 아무리 할머니가 2만 원 준다고 하셨어도 너는 일을 끝까지 안 마치고 중간에 갔잖아. 솔직히 만원 그 정도도 많은 거야. 외할머니나 되니까 그렇게 후하게 쳐 준거지 어디 가서 그렇게 일해봐라 그렇게 돈 많이 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