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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02. 2024
내가 그걸 어떻게 입혔는데
네 눈에만 잘 보여
2024. 10. 23.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내복 벗고 런닝으로 갈아입으면 안 돼?"
아드님이 아침부터 내복 가지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거 참, 조용히 학교 보내기 힘드네.
계속 런닝은 안 입겠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찬바람에 기침을 며칠 하기 시작하더니 스스로 런닝을 찾던 아들은 며칠 만에 이번엔 내복을 트집 잡았다.
"우리 아들, 오늘은 엄청 춥대. 그러니까 이제 런닝 말고 내복 입고 학교 가자."
아들 눈치를 살살 봐 가면서 나는 최대한 친절하게 제안했다.
"응, 알았어."
웬일이람?
한 번에 내 제안을 수락한 아들은 세상 온순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온순한 아들도 취향이란 게 확실히 있긴 했다.
내복을 입긴 입되 내복을 입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대놓고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그 취향을 애써 외면했을 뿐이고.
"이제 학교 갈 시간 다 됐네. 차 조심하고 잘 갔다 와."
이렇게 무사히 아침 등교를 하게 되는 건가 하고 안심하려는 찰나 갑자기 아들이 욕실을 한 번 다녀오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엄마, 이게 뭐야? 내복이 보이잖아."
과연 줄무늬 하늘색 내복 상의 목 부분이 아들의 티셔츠 위로 한껏 올라와 있었다.
한참 동안 아들은 옷매무새를 고치더니 그래도 성에 안 차는지 내게 불만을 제기했다.
"엄마가 런닝 입으라고 해서 입었는데 그냥 계속 런닝 입고 가면 안돼? 지금까지는 런닝도 안 입었는데 런닝 입는 것만도 어디야?"
어라? 얘 좀 보게나?
어디서 엄마랑 협상을 하려 드는 게지?
"갑자기 왜 그래? 보이긴 뭐가 보인다고 그래?"
아닌 게 아니라 아들 말마따나 아무리 요리조리 재주를 부려봐도 목 부분에 내복이 배꼼 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저거 저거 어떻게 손 보면, 잘만 하면 어떻게 되겠는데.
"티셔츠가 너무 목 앞으로 내려와서 그런 것 같은데. 옷을 뒤로 좀 당겨 봐. 그럼 안 보일 거야."
10년도 넘은 묵은 육아 코디 노하우로 나는 긴급처방을 내렸다.
급히 옷을 겹쳐 입을 때면 안에 있은 옷이 겉에 입은 옷 위쪽으로 보일 때가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 문제가 안된다.
어찌어찌하면 감쪽같이 속옷을 숨길 방법은 있었다.
문제는 그러나 하필이면 그날 아들이 입은 티셔츠의 목 부분이 살짝 넓었다는 것이었다.
내복이 보이지 않고는 못 배기는 목둘레였다. 상황은 점점 내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엄마. 내복이 다 보인다고. 자꾸 보여."
내복 그것 좀 보이면 어떻다고 저리 수선 일꼬?
입고 따뜻하면 그만이지 살짝 보이면 어때서?
입고 감기만 안 걸리면 그만이지(증명해 보일 수도 없고 확실하지도 않지만 나는 내복이 감기를 예방할 수 있다고 맹신하는 쪽에 가깝다.) 계속 보이는 것도 아니고 보였다 안 보였다 하면 좀 어때서?
"우리 아들, 내복이 보이긴 하지만 간헐적으로 보이잖니? 아주 많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아주 쪼금밖에 안 보이는걸. 자 선택해. 조금 보이더라도 내복 입고 감기 안 걸릴래 아니면 그냥 내복 벗고 가서 감기 걸릴래?"
라고는 양자택일의 선택권 같은 건 아들에게 주지 않았다 물론.
열 살, 남자 어린이 정도라면 내복에 예민할 수 있다는 데에 나는 급히 동의했다.
싫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굳이 벗는 것까지는 안 갔으면 좋겠다.
"우리 아들, 벌써 8시 30분이 다 됐네. 이제 가야 하지 않아? 비도 오니까 조심히 가야 돼. 알았지? 얼른 잠바 입어. 지퍼도 잠그고. 오늘 엄청 춥대."
등교시간 마감임박 알림 찬스를 썼다.
다른 건 몰라도 지각만은 하지 않겠다는 아들의 평소 의지를 잘 아는 엄마는 적절히 그 찬스를 사용할 줄 알았다.
부랴부랴 잠바를 입히고 친히 가방까지 둘러메어 주고 일방적으로 아들을 현관으로 떠
밀었다.
아들은 얼떨결에 현관문을 열었다.
"오늘도 급식 맛있는 거 많이 나오더라. 넌 좋겠다. 차 조심하고 잘 갔다 와!"
그 순간 그것만이 나의 최선이었다.
하교 후에 듣게 될 아들의 불만 같은 건 그때 닥치면 생각해 볼 일이다.
내일 걱정은 내일모레 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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