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자, 육이오

그날, 혹은 오늘

by 글임자
2025. 6. 25.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가 좋아할 줄 알았어. 내가 이걸 무조건 집에 가져와야겠다고 다짐을 했거든."

아들의 얼굴은 뿌듯함으로 넘쳐흘렀다.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뿌듯해했고, 엄마가 기대했던 것만큼이나 좋아해서 또 뿌듯했던 것 같다.


나보다 먼저 집에 도착한 아들이 현관에서 다짜고짜 나보고 눈을 감으라고 했다.

"아직! 엄마! 들어오면 안 돼. 먼저 눈을 감아. 감아야 돼. 보면 안 돼."

호들갑을 잔뜩 떠는 것을 보니 뭔가 있긴 있군.

"알았어. 얼른 해. 눈 감았어."

그러나 나는 살짝 실눈을 뜨고 있었다.

이미 아들은 자신의 선물을 챙기느라 엄마가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어 보였다.

"자, 이제 눈 떠도 돼. 봐봐."

"웬 몬스테라야?"

"오늘 학교에서 심었어."

"그랬어? 안 그래도 엄마 몬스테라 하나 갖고 싶었는데."

"그래? 잘 됐다. 난 엄마가 좋아할 줄 알았지."

"그래. 고마워."

"엄마는 식물을 좋아하잖아. 이것도 잘 키울 수 있지?"

"잘 키워 봐야지. 우리 아들 덕분에 몬스테라도 다 키워보겠네. 정말 고마워."

"역시 가져오길 잘했어. 난 엄마가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지."

"엄마 생일 선물 하면 되겠다. 그치?"

"생일 선물로 다음에 또 사 줄게."

"아니야. 지금 이미 집에 식물이 많이 있으니까 그만 사도 돼."

생일은 아직도 몇 달이나 남았는데, 엊그제 겨울이 끝났는데, 내 생일은 겨울인데 괜히 벌써부터 생일 얘기는 꺼내가지고 아들이 벌써부터 엄마 생일 선물을 챙기겠다고 나섰다.


이미 충분하다.

나는 이미 많이 가졌다.

식물은 이제 더 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세어보니 방과 거실에 있는 화분이 스무 개도 넘는다.

기쁨인 동시에 어느 순간 걱정거리로 돌변해 버리는 그 요망한 것들이 말이다.

"이제 화분은 더 안 들이려고 했는데 우리 아들이 준 거니까 특별히 더 신경 써서 길러봐야겠다."

선물을 준 아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근데 화분이 좀 작은 것 같으니까 바로 화분으로 분갈이해서 키우는 게 어때? 마침 엄마가 도자기 화분 큰 거 사 둔 거 있는데."

"오늘 심었는데? 아직 괜찮을 것 같은데?"

"나중에 어차피 분갈이해야 돼. 지금부터 뿌리가 숨 잘 쉬라고 좀 큰 데다 옮겨 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흙도 사 둔 거 있거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럼 내가 할게. 엄마. 내가 잘 알아."

도대체 뭘 잘 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들은 나섰다.

과감히 몬스테라를 한 손으로 덥석 잡고 화분에서 뽑아버렸다.

"근데 뿌리가 잘 안 심어졌다. 밖으로 다 나와버렸네. 흙으로 덮어야 하는 거 아냐?"

"엄마, 이 뿌리는 절대 자르거나 하면 안 돼. 원래 뿌리가 이렇게 밖으로 나온대."

"그래? 그런 얘긴 처음 듣는다. 그래도 묻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이건 원래 이렇게 된대. 나만 믿어."

하지만 '너만 믿'는 건 좀 그렇다.

보통은 뿌리가 햇빛을 보면 말라서 안 좋은 거라고 생각해 왔는데 뭘 알고나 말하는 건지 아들은 자기 말만 들으란다.

아들이 학교에서 처음 심었을 때부터 저렇게 뿌리가 하나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분갈이 후에도 같은 모양이 되었다.

식물 뿌리가 원래 밖으로 나와서 자란다는 말은 정말 금시초문이다,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이래로.

(* 혹시 아시는 분 적극 제보 바랍니다.)

몬스테라는 처음 키워보는 거고 아들이 하는 말도 뜨악하긴 했지만 일단은 아들 말을 듣기로 했다.

(듣기로 한 거지 믿기로 한 것은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는 바이다.)

분갈이를 하면서 나는 저 뿌리를 흙 속으로 집어넣으려고 했는데 아들이 한사코 말렸다.

언제 아들이 안 보는 데서 더 깊숙이 흙 속에 묻을 날은 새털처럼 많을 것이므로.

"엄마, 여기 구멍은 잎이 자기가 스스로 만든 구멍이야. 그러니까 우리가 따로 구멍 안 뚫어줘도 돼. 이렇게 구멍이 생긴 잎이 나오면 다른 잎이 또 나올 징조래."

"그래?"

"응. 이 구멍 사이로 햇빛이 들어가서 다른 잎도 햇빛을 받을 수 있으니까 엄마가 힘들게 화분을 이리저리 안 옮겨줘도 돼."

"근데 지금 저거 하나만 구멍이 나 있고 나머지는 다 구멍이 없잖아. 그래도 이렇게 잎이 많은데?"

아들 말은 뭔가 석연치 않았다.

내가 보기엔 구멍 난 저 잎이 가장 최근에 돋은 것 같은데 나머지 세 개의 잎은 그럼 어떻게 생겨난 거지? 나머지엔 구멍이 없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어쩌다 하나씩 구멍이 있는 잎이 나는 것 같은데 말이다.

(*이 미스터리한 점에 대해서도 적극 제보 바랍니다.)

아들이 처음에 몬스테라를 심어 온 화분에는 집에 있는 작은 스파티필름을 하나 심었다.

3세계 음악같은 도통 알 수 없는 명작이 그려진 화분에 말이다.



"오늘은 절대 못 잊겠다. 몬스테라를 처음 키우게 된 날이 육이오네."

"당연하지. 엄마, 절대 육이오를 잊으면 안 돼."

75년 전 그날을 잊지 말라는 건지 새 식구를 들인 기념적인 오늘을 잊지 말라는 건지.

어쨌든 잊지 말자, 육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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