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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럼 큰오빠는 누구랑 결혼해?

큰아들을 깜빡하신 건 아니죠?

by 글임자
2025. 8. 19.

< 사진 임자 = 글임자 >


"큰아들은 안 된다, 안 돼! 너는 나중에 절대 장남하고 결혼하지 마라."


마당에서 엄마와 쪽파를 다듬던 중이었다.

20년도 더 오래된 기억이다.

엄마는 시들한 쪽파를 심드렁하게 벗겨내시며 단호하고도 비장하게 말씀하셨다.

나는 너무 난데없는 '딸이 남의 집 맏며느리가 되는 일은 절대 결사반대'라는 막무가내식의 화법에 그만 화들짝 놀랐다.

저기요, 어머니, 진정하시고요.

엄마가 그동안 겪었던 맏며느리의 설움은 이 딸도 안타깝게 생각한답니다. 하지만 결정은 제가 할게요. 그리고 전 '그다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요.(당시엔 정말 그랬다. 나의 진심은 굳이 결혼을 왜 하나? 뭐 하러 하나? 굳이 꼭 해야 하나, 하는 그런 생각이 마음 가득 차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20년이 훌쩍 지난 이 시점에 아들 딸 낳고 자~알 살고 있는 내 모습 좀 보라지. 그것도 결혼하기 전에 혼인신고부터 하고 말이다.)

쪽파 한참 잘 다듬다가 이게 무슨 황당한 충고란 말인가.

'딸아, 너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라' 뭐 그런 거 비슷한 건가?

딸아, 너는 엄마처럼 장남한테 시집가지 말아라?


잠시 어안이 벙벙했던 나는 들고 있던 쪽파를 내려놓고 거침없이 말했다.

"엄마! 그럼 큰오빠는? 큰오빠 생각은 안 해? 큰오빠는 그럼 누구랑 결혼해? 엄마처럼 생각하면 누가 큰오빠랑 결혼하겠어? 엄마처럼 절대 딸을 큰아들하고 결혼 안 시키려고 하면 누가 큰오빠랑 결혼하겠냐고! 안 그래?"

내 대답을 들은 엄마의 표정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건 흡사,

"이것아! 너는 너고, 큰오빠는 큰오빠지. 아무튼 너는 절대 큰아들한테 가지 마라."

라고 온 얼굴로 얘기하시는 것 같았다.

잠시 엄마는 할 말을 잃은 듯 보였고 나는 잽싸게 그 틈을 타서 몇 마디 더 보탰다.

"딸한테는 절대 큰아들하고 결혼하지 말라고 그러고, 그러면서 큰아들은 결혼시키고 싶고. 그게 말이 돼?"

역시나 엄마는 잠시 멍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 어머니께서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계신 듯하옵니다. 모순이라는 말을 아시는지요? 절대 뚫리지 않는 방패와 무엇이든 다 뚫을 수 있는 창 말입니다. 이 둘을 동시에 쓰면 어떻게 되지요? 한 마디로 말이 안 되는 거 아니옵니까? 딱 이 상황에 제격이군요. 어머니는 지금 너무나 모순적인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어떻게든 딸은 남의 집 큰아들을 피해서 결혼시키고 싶으면서 내 큰아들은 당연히 결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다니요! 이런 어불성설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라고 쓰라린 상처에 소금을 들이붓는 불효막심한 발언 같은 건 결코 한 마디도 더 보태지 않았다, 물론.

우리 엄마지만, 이건 좀 그렇다.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내 딸이 귀하면 남의 집 딸도 귀한 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 집 장남 결혼시키고 싶으면 남의 집에서도 장남을 결혼시키고 싶어 한다는 것을 정녕 엄마는 모르쇠로 일관하실 작정인 건가?

'내 딸은 장남만 아니면 돼, 그러면서 동시에 내 큰아들은 장남이어도 결혼시키겠어!' 이런 마음인 건가?

설마, 우리 엄마 벌써 시어머니노릇 하시려는 건가?

내 딸은 안 되고, 남의 딸은 되고?

남의 집 장남이 안 되면 우리 집 장남도 안 되는 거지.

그래야 말이 되는 거 아닌가?

그래야 공평한 거 아닌가?

아니, 최소한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시 스무 살 언저리였던, 파릇파릇했던 시절의 나는 엄마에게 할 말을 다 해 버렸다.

못 할 소리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해서

"엄마, 걱정 붙들어 매셔. 엄마 말 새겨들을게. 엄마 말대로 절대 절대 큰아들하고는 결혼 안 할게. 큰아들 아니어도 남의 집에 아들들은 많아. 반드시 앞으로 둘째 아들부터 생각해 볼게. 하지만 걱정 마. 큰오빠는 결혼할 수 있을 거야. 난 절대 큰아들하고 결혼 안 할 생각이지만 남의 집 딸은 우리 큰오빠랑 결혼하려고 할 거야. 아무렴! 최소한 한 명은 있을 거야. 있고 말고."

라고는 입에 발린 철딱서니 없는 아첨 같은 것도 절대 하지 않았다.


딸이 그렇게 나오리라고는 예상도 못했다는 듯이 엄마는 내 말을 가만히 듣고만 계셨다.

그리고, 점점 엄마의 어깨가 한여름의 시들한 쪽파보다도 더 축 처져 내리기 시작했음은 물론이다.

내가 너무 멀리 갔나?

하지만 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나라도 그런 말을 해야 했다.(고 나름 애써 변명하는 중이다.)

물론 딸을 생각해서 하시는 말씀인 줄은 잘 알겠지만 그건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딸 생각에 그만 당신의 장남을 깜빡하신 엄마가, 그저 안타까웠다.

딱하기도 하지 , 우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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