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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남을 피하고 싶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청개구리가 된 딸

by 글임자
2025. 8. 26.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내가 맏며느리로 와서 얼마나 고생하고 산 줄 아냐? 너는 큰아들하고 결혼하지 말아라. 알았지? 맏며느리는 고생이다, 고생."

이번엔 당숙모였다.

엄마에게 혼전 특별 당부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단지 샘에서 뭔가를 씻고 있었을 뿐이었다.(해방둥이 아님 주의! 그 시절 20년 전에 우리는 샘을 이용했었고, 멀쩡히 수도와 전기가 사용가능한 시골에서 살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한 다리 건너인 큰집 당숙모가 맏며느리로서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는 나는 잘 모른다. 당장 우리 엄마 이야기만 듣기에도 벅찬데 당숙모의 시집살이라니!

"맏며느리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너는 모른다.(내가 굳이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맏며느리는 할 일도 많고 고생도 많이 한단다.(내가 내일모레 뉘 집 맏며느리도 들어갈 것도 아닌데 너무 앞서가신다.) 아무튼 큰아들만 아니면 된다. 큰아들한테 가면 안 돼!(그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그 어느 남의 집 큰아들을 만나 본 적도 없었다.) 너희 엄마 봐라. 엄마 고생하고 산 것 보고도 장남한테 갈래?(그때까지만 해도 난 구체적으로 엄마가 어떤 고생을 하고 사셨는지도 잘 몰랐고, 짐작조차 못 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반드시 장남과 결혼하겠다고 작정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당숙모가 나를 당신의 딸로 착각하고 계신 거 아닌가, 지금?

딸에게 해야 할 말씀을 나한테 하고 계신 건가, 혹시?

큰아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누가 큰아들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을까?

전국의 큰아들을 둔 어머님들이 이 얘기를 들으시면 얼마나 서운하실꼬?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당숙모에게도 아들이 한 명 있는걸?

아들 하나 딸 하나니까 그 하나뿐인 아들이 큰아들이고 막내아들이고 그런 거 아닌가?

당숙모도 잠시 뭔가 착각하고 계신 게 틀림없다.(고 나만 혼자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당숙모, 당숙모도 참 딱하세요. OO이 있잖아요? 그 생각은 안 하세요? 따지고 보면 OO이도 장남인 셈 아닌가요? 그리고 요즘 애들은 다 하나 둘이라 어지간하면 다 장남인걸요? 그런데 어떻게 장남을 피하라고 하시는 건가요? 요즘 같은 세상에 장남 아닌 집이 어딨어요? 아들 하나밖에 없으면요? 그럼 어떻게 해요?"

라고는 주제넘은 말 같은 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물론.

잠자코 듣고 자꾸만 샘물을 길어 올렸다.

대신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요새는 아들이고 딸이고 한 둘밖에 없어. 아들 하나만 있는 집은 그 아들이 장남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다 따질 거면 결혼 못 해. 아들 많은 집만 골라? 그중에서 둘째부터?"

놀랍게도 세 아들과 딸 하나, 자그마치 4남매를 둔 엄마는 '요즘은 다 애들이 한 둘'이라는 그런 말을 못 믿겠다는 눈치였다. (당시 우리 동네 평균 자녀 수는 최소 3명 이상이었다.)

어쩜 엄마도 아들이 '셋이나' 있으면서 그렇게 말할 수가 있을까?

팔이 안으로 굽어도 너무 굽어서 펴질 줄을 몰랐다.

딸에게 절대 장남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엄마가 자식인 내가 보기에도 살짝(아니 어쩌면 매우) 이기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엄마, 다들 엄마처럼 생각하면 전국에 있는 장남들은 다 결혼도 못하겠네. 다 장남 싫다고 그러면 어떻게 결혼하겠어? 큰오빠도 결혼 못하겠네, 그럼."

이렇게 거침없이 말해 놓고 나는 소싯적에 장남과 사귄 과거가 있다.

그리고 아무리 엄마가 당부하고 당부했어도 결국 장남과 결혼하게 되었다.(소싯적 사귄 장남과 현재 우리 집 양반은 별개의 인물임은 물론이다.)

왜 나는 장남만 사귀고 장남하고 결혼했던가!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말만 잘한다'라고 한다지 아마?

생각해 보니 내가 처음으로 장남 남자친구를 사귀었을 때 내 친구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장남이라며? 생각만 해도 부담스럽다. 장남은 좀."

도대체 장남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길래?

맏며느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길래?

그렇게 말했던 친구도 '결국' 장남과 결혼했다는 안타까운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기원전 3,000년 경 자신이 이런 말을 했었다는 걸 그녀는 기억이나 할까?

(사실 그 친구의 둘째 언니가 장남과 결혼했는데 요구사항과 의무 사항이 너무 심해서 치를 떨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장남과 맏며느리에게 뭔가 기대하는 게 엄청나기도 한가 보다.

난 (장남에게) 별 기대도 없었고, (만에 하나 맏며느리가 되더라도) 뭘 어떻게 해보겠다는 의지도 없었는걸?


엄마는 어쩌면 하나뿐인 딸이 장남을 피하길 기도하는 것보다는 미래의 맏며느리에게 어떻게 덜 부담스러운 시가 환경을 제공할지, 어떤 시어머니의 마음가짐으로 대할지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하고 노력해야 했는지도 모른다.(고 또 주제넘게 오지랖을 펄럭였다.)

'현재 아들만 셋 둔 맏며느리'를 생각하고 당신의 맏손주를 생각하면 앞으로는 남에게라도 절대 그런 발언은 하지 못하시겠지, 이제?


사는 건 그런 건가 보다.

내가 장남을 피하고 싶어서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애를 써도 장남은 내 옆에 (과거에 있었고, 현재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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