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 몰래 딸에게만 알려주는 엄마의 일급비밀

보안유지가 관건

by 글임자
22. 12. 2. 가벼운 김장하기

<사진 임자 = 글임자 >


"다음 주 목요일에나 김장해야 쓰겄다. 아침에 일찍 와라."

"벌써?"

"그래. 너희 언니들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아라."

"알았어. 근데 몇 포기나 할 건데?"

"얼마 안 해. 올해는 100 포기밖에 안 해."

벌써 5년 넘게 비밀 김장을 하고 있다.

엄마는 행여라도 일급비밀이 새어나갈까 봐 딸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첫째 아들을 비롯하여 첫째 며느리를 포함한 총 6명의 아들 며느리에게는 우리 집 김장날이 언제인지 절대 알려서는 안 된다 하시면서 말이다.


일주일 전이었다.

친정에 들렀을 때 흘리듯 엄마는 올해 김장 날짜를 알려주셨다.

"다다음 주에 오빠랑 온다고 하더라. 그때 오면 같이 김장하자고 하는데 그전에 해야제. 그래야 오면 바로 다 가져갈 것 아니냐.(=세 며느리는 올해도 김장에서 제외하고 딸만 와서 일해라.)

기습적으로 김장을 하는 것은 엄마의 오래된 습관이다.

과거엔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했었는데 점점 김장 시기가 빨라지고 있다.

온 가족이 모이기로 한 전 주에 일을 해치우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세 아들과 며느리들이 종종 전화를 해서 물어본다.

"어머님. 올해는 김장 언제 하세요? 저희 내려가면 같이 하게 힘들게 혼자 하지 마세요."

"알았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다 알아서 할게(=나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그 딸이랑 둘이 하면 된다. 며느리는 안 와도 된다. 배추 그거 100 포기 밖에 안 되는 거 둘이 하루 종일 하면 금방 끝난다. 너희는 다 해 놓으면 가져가서 먹기만 해라.)"

"어머님이 전에도 같이 한다고 하시고 아가씨랑 다 하셨잖아요. 힘드니까 같이하게 기다리세요. 아셨죠?"

"알았어. 걱정하지 말라니까. 내가 다 알아서 할란다.(=나에게도 친딸이 있는데 왜 남의 집 딸을 고생시키냐. 내 딸 데리고 내가 다 할란다. 와서 가져가기나 해라.)


나는 친정에서 김치를 가져다가 먹을 예정이므로 당연히 김장에 동참한다.

며느리를 아끼고 싶은 엄마 마음을 충분히 존중하여 엄마의 결정에 아무 참견도 하지 않았다.

나 하나 그날 고생하면 되지 친딸인 내가 있는데 굳이 남의 딸까지 고생시킬 거야 없지 않은가.

몇 년 해 보니까 배추 100 포기 정도는 뭐, (나에게는 딱 하루, 부모님에겐 며칠이 되겠지만) 딱 하루 죽지 않을 만큼 조금만 고생하면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는 법이니까.

그리고 배추 100 포기 김장하다가 딸이 힘들어서 죽었다는 뉴스 기사는 아직 접해보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김장이란 걸 하기 시작한 이래로.


며느리들을 불러 같이 하고 싶으면 엄마가 어련히 알아서 전화하실까.

엄마 며느리지 내 며느리는 아니고, 어디까지나 나는 시누이일 뿐이니까 김장과 관련해서는 내가 낄 자리가 아니다.

엄마의 방식도 나름 괜찮았다.

나는 그저 친정에서 호출한 날짜에 잽싸게 달려가 열심히 일을 하고 오면 그만이다.

시어머니가 와서 도와달라고 전화하면

"싫어요. 김장하기 싫어요."

이럴 며느리는 셋 중에 한 명도 없다고 확신한다.


우리 엄만 복도 참 많지, 어디서 저런 며느리들을 다 봤는지 남들도 칭찬이 자자한 며느리들이다.

나는 며느리도 없는데 내가 다 탐이 난다.

내가 옆에서 보기에도 요즘 세상에 그런 며느리들 없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기들끼리는 갈등도 있을 테고 좋은 날도 싫은 날도 많을 테지만 우리 부모님에게만큼은 정말 효부 소리가 절로 나오게 그 정도면 다들 훌륭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일방적인 관계는 없을 것이다.


"혹시 너희 언니가 김장 언제 하냐고 물어보면 모른다고 그래라잉."

친딸을 못 믿고 엄마는 내게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는지 모른다.

구두로 하는 '김장 날짜 정보공개 청구'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시다.

엄마도 문서 형식주의 숭배자자란 말인가.

"알았어, 걱정 마. 말 안 할게."

간혹 몇 년째 이런 식으로 비밀 김장이 이뤄져 오빠나 언니들이 왜 김장을 힘들게 혼자 다 하시냐고 다 같이 모여서 도와가며 하자고 강하게 반발해도 엄마는 꿈쩍도 안 하신다.

일단은 가족이 많이 모이면 너무 수선스럽고 복잡해서 싫으시단다.

그건 나도 동감이다.

가뜩이나 사람들도 많아져 복잡한데 일이 되기나 할까 싶기도 하다.

나도 소수 정예반으로 할 일을 딱 하고 치우는 게 좋다.


엄마에게서 좋은 거 하나 배웠다.

내 딸만 아낄 게 아니라 남의 집 딸들도 아껴줘야지.

아니 (가능하다면) 내 딸보다 더 아껴줘야지.

최소한 귀찮게는 안 해야지.

시어머니랍시고 무조건 대우받기만을 바라지는 말아야지.

내가 먼저 대우받을 행동을 해야지.(말이 그렇다는 거지 대우받겠다는 말도 아니다. 남한테 그런 바라는 거 아니다.)

만에 하나 내가 나중에 시어머니가 된다면 나도 김장날 며느리를 호출하지 않으리.

며느리도 며느리 인생이 있을 텐데 뭐든 내가 혼자 감당할 정도로만 일을 벌여야지.

혼자서 감당하지도 못할 일을 크게 벌여놓고 당연히 아들 며느리가 도와주겠거니, 안 오면 안 온다고 서운해하고 그런 불상사는 애초에 안 일어나게 단속해야지.

며느리를 호출하는 일은 드물수록 좋을 것이다.

며느리의 사생활을 존중해 주리라.

시어머니라고 해서 시도 때도 없이 마구 며느리를 찾지는 말아야지.

결혼 전 신부 수업은 못 받았지만 시어머니 수업이라도 미리 잘 받아두자.


어제 아침에도 엄마는 아침 일찍 전화를 하셨다.

"애들 학교 갔냐. 얼른 와라."

딸 같은 며느리는 없다지만(불가능한 일이라지만), 며느리 같은 딸은 어디 없나?

딸을 며느리 대하듯 하면 우리 엄마도 아마 아침 일찍부터 나한테 얼른 오라고 절대 전화 못 할 거야.

"우리 엄마는 며느리들한테는 전화 않고 나한테만 전화해서 김장하러 오라고 그러신단다."

친구에게 말했더니

"너희 엄마 완전 내 이상형 시어머니야. 진짜 귀찮게를 안 하셔. 너희 집에 며느리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근데 하나밖에 없는 시누이가 너라서 안 갈란다."

하며 때늦은 한탄을 했다.

우리 오빠들 의견도 들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나도 너를 내 새언니로 맞이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격하게 반응했음은 물론이다.) 이미 오빠들도 친구도 각자 가정을 꾸리고 있는 사람들이다.


며느리는 항상 어렵다고 말하는 우리 엄마.

엄마 말이 맞지.

남의 집 자식인데 어렵게 생각해야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도 필요하지.

그럼 나는? 나는 쉬운 딸인가?

딸이니까 편해서 그러시는 거겠지.

나도 연례행사처럼 엄마랑 둘이서 김장하는 일에 익숙해져 이젠 당연히 그러려니 한다.

엄마 혼자 고생할 거 뻔히 아니까 나도 해마다 도와드리는 것이고, 그렇다고 새언니들이 없다고 해서 서운하다거나 그런 마음은 진심으로 전혀 없다.

그저 각자 가족들과 화목하게(인지 아닌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나 편한 쪽으로만 생각하고) 지내는 것만으로도 내가 다 고맙다.

김장 때는 참여 못하더라도 평소에 세 며느리들은 친정 부모님께 꾸준히 잘하는 편이다.


점점 김장 규모가 줄어드는 것 같다.

기본 150 포기는 했었던 것 같은데.

오전 9시 넘어서부터 점심시간 30분 정도를 빼고 4시까지 쉬지 않고 일을 했더니 등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50분 근무, 10분 휴식 이건 꿈의 직장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해마다 느끼는 거지만 복지 측면에서는 다소 아쉬운 점이 많지만 이렇게 탄력 근무를 할 수 있는 근무지가 세상천지에 또 어디 있으랴 싶다.


쌀쌀하게 깊어가는 어느 겨울밤, 며느리들이 어제도 가정을 지키고 집안 잠을 자며 평온히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 순간 파스 냄새도 향기롭게 디퓨져 삼아 끙끙대며 뒤척이는 시누이가 한 명 있을 뿐이었다.

이전 01화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모르는 세 며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