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남편의 외박

나에겐 다다익선인 것

by 글임자
22. 12. 19. 독야청청하리라.

< 사진 임자 = 글임자 >


"일도 많은데 워크숍은 무슨 워크숍이야. 진짜 가기 싫다. 무슨 워크숍을 1박 2일씩이나 가나 몰라."

워크숍 일정이 잡힌 그 순간부터 그 남성은 집에 와서 연거푸 볼멘소리였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10박 11일도 난 좋아. 그 많다는 일 내가 대신이라도 해 줄게. 걱정 말고 어여 다녀와. 사람이 마무리가 아름다워야지. 그런데 빠지면 쓰나? 어차피 내년이면 헤어질 사람들인데 기분 좋게 다녀오시오."

라고 말할 뻔했다.


그 남성이 외박해서 좋은 날,

이 은혜받은 느낌, 뭔가 충만해지는 기분, 마음까지 따뜻하게 전해져 오는 온기, 온 집안이 내 것 같은 착각, 세상이 내게 주는 선물, 전부 어젯밤 단 하루다.


일부이지만 자식들 다 키워놓고 나서 '빈 둥지 증후군'에 힘들어하는 여성들이 있다고 한다.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앞으로도 그럴 것 같기도 하다.) 도대체 난 저게 무슨 소린가 싶다.

결혼은 했지만, 자식들이 있지만, 정말 나만 혼자이고 싶은 순간들이 꽤 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전에 지인들과 얘기해 보면, 특히 워킹맘 시절에 같은 워킹맘들은 그런 시간들을 절절하게 기다려왔다.

물론 쉽게 허락되지 않는 시간, 꿈만 꿔 보는 시간들 말이다. 그런 건 자녀가 어릴수록 비려했다.

그렇다고 직장 생활을 하지 않는 여성들에게도 그런 바람이 없는 것은 아니란 것도 잘 안다.

꼭 여성뿐이랴. 남성들도 마찬가지겠지.

아빠들도, 남편들도 아이들 없이, 아내 없이 혼자만의 공간에서 혼자만의 여유로움을 만끽하고픈 갈망 누구에게나 있겠지.

어울려 사는 생명들은 누구나 살면서 느끼는 그런 혼자이고 싶은.


2 주 전엔가 그 남성은 내게 통보했다.

"다다음 주에 워크숍 두 번이나 있어."

"그래? 어떡해? 그런 거 안 좋아하는 사람이 두 번이나 있어서?"

"나 진짜 그런 데 가는 거 안 좋아하는데 마지막이라 안 갈 수도 없고 진짜..."

그다음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같이 살면서 내내 하던 소리가 있었으므로 내가 그의 말을 댕강 자른다고 해서 큰 화를 입지는 않을 터였다.

"그래도 마무리가 좋아야지. 눈 한 번 질끈 감고 다녀 오슈."


"아니, 1박 2일씩이나 간다고? 이게 웬 횡재냐! 뭐가 무서워서 워크숍을 못 가? 조직생활하는 사람이 그런데 빠지면 못써요! 나보고 맨날 뭐라고 그랬어? 사회생활, 조직생활은 싫어도 억지로 해야 하고 가기 싫어도 가야 하고 어느 정도 비위도 맞춰줘야 한다고 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사람이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지. 아무렴. 어디 못 갈 데 가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직원들끼리 하는 워크숍이잖수. 그냥 마지막으로 한 번 어울린다 생각하고 같이 가. 지금 안 간다고 그러면 '어차피 앞으로 같이 일 안 할 거니까 이제 막 나가네.' 그런 소리나 들을 거야. 그동안 잘해 왔으면서 막판에 이럼 안되지 않겠어? 솔직히 좋아서 가는 사람 얼마나 있겠어? 그냥 다들 마지못해 가는 거지 뭐. 그 이틀 사이에 애들 데리고 어디 밤도망 안 갈 테니까 아무 걱정 말고 잘 다녀와."

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물론.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 걸 꾹 참았다.

참을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아내가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합법적인 그 남성의 외박.

나는 그 남성이 집에 없는 날이 좋다.

이유는 다양하다.

가장 큰 이유로는,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단지 없으면 좋다는 거다.

뭐랄까,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들어 올리듯'('맛지마니까야' 중에서)

환희심에 불탄다고나 할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 남성은 잔소리가 많아지고 길어졌다.

그에 대항해 나는 굵은 소리만 짧게 하려고 한다.

하지만 사람이 마음먹은 대로만 잘되지 않는 법, 내 뜻대로 되지 않아 나도 사람인 것이다.

가볍게는 느닷없이 냉장고 문을 열어젖히며 음식의 보관상태라든지 유통기한이라든지 반찬들의 배열 순서라든지를 핏대 올리며 일장연설을 늘어놓으실 때면 나는 그만 좀 더 치밀하지 못했던 나의 살림 솜씨를 뒤늦게 한탄하게 되는 것이다.

집안 살림살이에도 살뜰히 간섭하시며 나투시는 데는 나도 평정심을 유지하기 힘들 때가 있다.

정작 그 남성과 내가 반드시 나누어야만 하는 알맹이 있는 대화는 오간데 없고 불요불급한 한낱 물건의 위치라든지, 미처 처리하지 못한 채 현관에 자리매김한 재활용품들의 안부와 아내 되는 사람의 나태함(항상 나태한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에 대한 지적질 따위가 어찌 그리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한 마디로 그 남성은 온갖 간섭과 잔소리를 일삼는 분이시다.


저런 모든 것들에서부터, 비록 하룻밤이긴 하지만 나는 한량없는 방만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 밤이 이대로 멈추었으면 좋겠다, 고 감히 불가능한 염원을 품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신은 모든 걸 다 주지는 않으신다.

어제 낮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 그 남성은 집에 들이닥쳤다.

집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하시겠다고 일방적이고도 기습적으로 제집 가정 방문을 하고 한 숨 주무시고 3시가 넘어서야 집을 나섰다.

나는 다만 조금 울적해졌다.

게다가,

‘내일도 그냥 일찍 빠져나와야겠어."

라며 끝까지 나를 실망시키는 그 말은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평화로운 나의 일상에 그 남성이 끼얹은 찬물이 뼛속까지 얼얼하게 시리도록 차갑다.


저녁 7시경, 나의 진심이 어떠한지 전혀 알 턱이 없는 그 남성은 무슨 사진을 전송해 왔다.

읽는 대신 살짝 옆으로 밀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나 혼자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눈치 없이 끼어드는 그 불청객을 상대하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다.


10년 전쯤, 시험 합격을 하고 발령이 나기 전에 혼자 여행을 가겠다고 제주도로 홀연히 떠난 그 남성의 만행을 떠올렸다.

그때도 딱 이맘때였다.

첫아이를 임신하고 미친 듯이 입덧을 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찾아 먹는 아내는 민원실에서 별의별 민원들을 다 상대하며 태교라고는 눈곱만치도 못해보고 일하랴 토하랴 정신없는데 자꾸 사진을 보내왔다.

그것은 사진 세례였다.

내가 요구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는 제주도 풍경 사진, 게다가 더 끔찍한 건 내가 결코 원한 적 없는 그 남성의 셀카.


일하기도 바쁜 근무시간에, 한가하게 여행 떠난 그 남성이 보내온 사진은 차라리 나로 하여금 더욱 격하게 토하게 만들었다.

정작 떠나고 싶은 사람은 나였다.

결혼하자마자 수험생이 된 그 남성을 일 년 가까이 뒷바라지 한 아내가 꿈꿔봄직한 사소한 욕심, 그 정도는 무리가 아닐 거라고 나만 생각했다.

가고 싶어도 못 가고 출근했는데 누굴 약 올리나?

사진에 대한 답장이 없자 그 남성은 줄기차게 전화를 해대기 시작했다.

아, 그때 나는 스토킹 신고를 했어야만 했을지도 몰랐다.(그 상대 남성이 배우자라는 점이 문제없이 받아들여진다면 말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공무집행 방해죄에는 해당되지 않나요?"

라고 소심하게 물어볼 수도 있었으리라.

나는 답장 대신 그 남성의 번호를 수신 차단했다.


그 남성이 없는 집에서 그 남성을 떠올리는 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그 밤도 나는 그 남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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