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령이 나서 해가 바뀐 걸 알았다.

남편이 (근무지가) 달라졌어요.

by 글임자
22. 12. 31. 오고 가는 것

< 사진 임자 = 글임자 >


"이젠 정말 월요일부터 새로 출근하네. 신경 쓰인다."

"처음엔 다 그렇지 뭐. 몇 달 하다 보면 익숙해지겠지."

"금요일에 밥 먹으면서 사무관님이 그러시더라. 걱정되지? 이러면서 다들 그렇게 처음엔 겁먹는다고,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말고 가서 잘하라고. 그래도 사람이 쉽게만 살면 되겠냐고. 죽을 때 후회가 되지 않겠냐면서..."


나는 장담할 수 있다.

그도 장담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죽을 때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임을...

그 남자, 쉽고 싶은 사람, 굳이 어렵게 살고 싶지 않은 우리 보통의 인간.


"그래. 처음이라 낯설어서 그렇지 사람 사는 덴데 거기라고 별거 있을까?"

"그래도 은근히 신경 쓰이긴 해. 이런저런 생각도 많이 들고."

"그나저나 사무실에서 빠뜨린 거 없이 다 챙겨 온 거야?"

"아, 맞다. 실내화. 실내화를 안 가져왔네."

"내 그럴 줄 알았지. 그러게 미리 챙기라니까."

"이젠 갈 일도 없을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니까 미리미리 하라고 했잖아. 뻔히 1월부터 딴 데로 출근하는 거 다 정해졌는데 늑장 부리다가 급하게 하려니까 자꾸 이것저것 빼먹잖아. 혹시 또 빠뜨린 거 없어? 챙겨 와야 되는데 안 챙겨 온 거라든지?"

"마지막에 일이 너무 많았잖아. 그래서 정신없어서 깜빡했지."


마지막에 일이 많았다는 것은 둘째 치고, 이제 발령받을 곳이 정해진 게 벌써 몇 주 전의 일인데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 2주에서 3주 정도 가량 시간은 충분했을 거라 나는 생각했지만 우리 부부는 여러모로 서로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들이라 그 사람 입장은 또 달랐다.

내가 보기엔 자주 어떤 일이 닥쳐서 급하게 처리하는 편인 것 같았는데, 그래서 그게 매번 불안하고 아슬아슬했는데 또 닥치면 어찌어찌해서 일을 처리해 나가기는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긴 해도, 나 같으면 저렇게 하지 않을 일을 왜 저렇게 하나 싶어도 내가 해 줄 일도 아니고 간섭할 일도 아니므로 혼자서만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 나 같으면 메모해놨다가 체크하면서 챙겼을 텐데. 짐 정리하다 보면 정신없잖아. 일일이 확인해도 나중에 보면 빠진 게 꼭 있더라니까."

"어떡하지? 이따가 나랑 같이 실내화 사러 가지."

"난 안가. 왜 꼭 나를 데리고 가려고 그래?"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 커피 한 잔 타 줄게. 응? 스타 복수 한 잔 어때?"

"라테."

"하여튼 너희 엄마 입맛 까다로운 건 알아줘야 돼."

라테 먹는다고 입맛 까다롭다는 소리 나 듣자고 내가 주문했던가?

만들어 주신다기에 이왕이면 라테다 그런 거지.

어차피 건성인 남편은 시간이 지나면 다 잊을 게 분명했다.

실내화를 두고 왔는지 나보고 뭘 사기 위해 나가자고 말했었는지조차도.

어제 오전에도 마무리 못한 일이 있다며 사무실로 출근하고 낮에 돌아온 그는 뒤늦게서야 실내화의 부재를 알아차렸던 것이다.


해가 바뀌고 근무지가 바뀌고 조직이 완전히 바뀌는 일에 남편은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는 눈치다.

왜 안 그렇겠는가.

하다못해 아이들이 전학을 가더라도 알게 모르게 받게 되는 스트레스가 있을 텐데, 마흔이 된 남자를 어찌 전학생에 비하랴.

아이나 어른이나 환경이 달라진다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크나큰 변화이며 은근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직장 생활을 하며 2,3 년마다 근무지를 옮기며 여러 곳에서 근무를 했지만 10년이 훌쩍 넘었어도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니다.

떠날 때가 되어서야 함께 했던 이들이 새삼 소중해지고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생뚱맞게 그 누군가에게 '그러니까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 하시라'는 말을 꼭 하고만 싶다.하지만 그걸 꼭 눈치주어야 알 일이던가.


남편의 호들갑스러운 발령 덕에 해가 바뀌는 걸 알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예상 밖의 일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 다소 지난했던 날들, 이 모든 게 그저 내가 떠나온 과거일 뿐이라는 게 아직도 어리둥절하다.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해방 내지는 낯선 것으로의 침투.

12월의 마지막과 1월의 첫날.

보내주는 미련과 맞이하는 두근거림.

이맘때만의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매년 똑같이 시간은 흐르지만 지나간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 속에서 이제 더는 하나 더 얹어지는 숫자가 아쉽지도 설레지도 않는다.

문득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생급스러움, 무덤덤해진 마흔세 해, 그저 여전히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복된 날이다.


지난 한 해, 지독하게 해피 엔딩이다.

새해도 거센 풍랑 없이 내가 가르는 물결이 잔잔하기를 소망한다.

아니, 세찬 파도를 만나더라도 내가 탄 배는 난파선이 되지는 않길 바란다.

그리고 또 나는 그렇게 살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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