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나 평범하고 보통인 하루
복된 어느 새해
23. 1. 3. 너는 나의 생명줄이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사진 임자 = 글임자 >
"독감입니다. 5일 간 격리하세요. 외출하지 마시고요."
다행히 나만 독감이다.
아이들은 아니었다.
병원에 가기 전에 코로나 검사를 했는데 그건 비켜갔다.
진심으로, 아이들로부터 완벽히 격리되고도 싶었다..
나와 딸과 아들 셋이 몸져누웠다.
처음엔 아들이 간간히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열이 나더니 조짐이 좋지 않았다.
어미는 속으로 생각했다.
'자식이 고통받는 것을 차마 못 보겠다. 차라리 내가 아프고 말지.'
특별히 감기 걸릴 만한 일을 한 일도 없었던 것 같은데 고통은 이렇게나 갑자기 들이닥친다.
워크숍을 가고 회식이란 회식은 다 다니고 당구도 치고 공연 관람도 하러 다닌 사람은 멀쩡한데 조신하게 집안에서만 생활한 우리 셋만 이렇게 되다니 뭔가 좀 억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짚이는 데가 있기도 했다.
얼마 전 날이 따뜻한 것 같아 얇은 레이스 블라우스 하나만 입고 재킷을 걸치고 외출한 적이 있었다. 평소엔 내복을 입고 다니지만 그 재킷을 입을 때는 반드시 레이스 블라우스 하나만이라야 했다.
멋 내다 얼어 죽기까진 안 했어도 독감 걸리는 사람이 분명히 있었다.
셋 다 평소보다는 기운이 없어 이불속으로만 파고들었다.
겨울방학 계획표가 야무지게 책상 위에 버티고 있었지만 나도 아이들도 당장 생존이 급했다.
아들이 방을 왔다 갔다 하더니 손가락을 문틈에 넣고 문을 닫아버렸다.
반달이 있는 새끼손가락 손톱 아래가 움푹 파이고 멍든 것처럼 새파래졌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처음엔 아무 느낌이 없다가 제 손을 보고 지레 겁을 먹고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
그 와중에 딸이 갑자기 욕실로 달려갔다.
기침을 자꾸 심하게 하더니 변기에 닿기도 전에 한바탕 구토를 한 모양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내 정신도 정신이 아닌데 일어서야 했다.
예상한 대로 욕실 바닥과 발판과 발수건과 변기 여기저기에 구토의 흔적을 남겼다.
걷어붙인 팔뚝에도 구토한 흔적이 흥건했다.
위, 아래 옷도 예외일 수 없었다.
나도 지금 내 몸 하나 추스르기 힘들 만큼 삭신이 쑤셔대고 기운이 없는데 그 광경을 보자 차라리 울고 싶었다.
가뜩이나 비위도 약한 데다가 며칠 째 몸이 안 좋아 자리보전을 하고 있는데 역한 냄새가 올라와 나까지 변기를 부여잡을 뻔했다.
내 몸 안에서 뼈란 뼈는 쏙쏙 다 빼내버린 것처럼 연체동물같이 흐느적거리는 몸을 간신히 이끌고 욕실 청소를 했다.
옷가지는 헹궈도 헹궈도 역한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세탁기를 돌릴 것이지만 애벌 손빨래를 해야만 했다.
한참이나 눈물을 쏟는 아들을 달래주고(정작 위로받고 싶은 사람은 나였다.) 밥을 안치기 위해 또 흐느적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녹록지 않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밥은 이왕이면 새 밥을 지어주고 싶어서이다.
아이들과 내가 먹을 것은 간단히 저녁 요기할 게 있긴 했지만 남편이 퇴근 후 먹을 밥은 없었다.
몸이 너무 아프고 종일 지친 데다가 나도 밤잠 설치다가 새벽에 토하느라 아침엔 일어나지도 못했었다.
별 말이 없는 걸 보니 첫날부터 늦게까지 일하나 보다 그렇게만 생각했다.
한창 바쁘게 일하는데 방해될까 봐 언제쯤에나 퇴근할 건지는 묻지도 못했다.
이렇게 내 몸이 성치 않은 데다가 아픈 아이들 까지 건사하느라 내 꼴도 말이 아니었고 아무 힘이 없어서 알아서 저녁을 해결하고 왔으면도 싶었다.
이런 날은 나 좀 봐줄 수 없으려나.
하루는 밤 새 열나고 기침하는 아들을 간호하느라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하루는 내가 밤새 기침을 해대는 통에 10분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흐리멍덩한 상태로 아침을 맞았다.
며칠째 내게 닥친 시련은 가혹했다.
차라리 내 몸이 플라스틱이라도 좋으니 고통을 느낄 수 없는 그런 것들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고장이 나고 이상이 생기면 차라리 부품 갈아치우듯이 새것으로 바꾸고 싶을 지경이다.
이렇게까지 아프면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지는 않다.
겨우 몇 발짝 떼서 새로 밥을 짓고 맛도 모르는 죽을 반찬도 없이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그래도 사람이 먹어야 살지.
나는 그렇다 치고 아이들도 있으니까.
엄마는 아파도 할 일은 해내야 했다.
식욕도 없고 앉아있을 기운도 없어서 전날에도 하루 종일 거의 안 먹었더니 속이 너무 쓰려서 몸이 더 아프기만 했다.
나도 나지만 아이들 끼니도 챙겨야 했다.
아이들이 하는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졌다.
이 모든 게 아픈 몸 탓이다.
이 몸뚱이가 한없이 짐스럽다.
자꾸 기침을 하는 아들에게 배즙을 갖다 줬다.
"엄마, 흘렸어."
이불 싸매고 마시는 폼이 어째 불안 불안하더라니.
전날 아들이 토해서 빨았던 이불이다.
그날도 손으로 애벌빨래하느라 애 깨나 먹었었다.
그 커다란 겨울 이불을 손빨래한다고 공들였던 내 손이 다 불쌍하다.
본전 생각까지 난다.
빨래한 지 겨우 하루 지났을 뿐인데.
저녁 8시가 훌쩍 넘어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지금 회식해. 내가 말 안 했나? 오자마자 회식이네."
정말 이 사람들이 보자 보자 하니까...
미리 문자라도 한 번 보내주는 게 그렇게도 어려운가.
나 같았으면 회식 자리에 가는 차에 시동을 걸기 전에 회식 간다고 간단히 문자라도 한 번 보내줬을 텐데.
나는 무얼 바라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남편을 위해 새 밥을 지었던가.
여전히 남편만 제외하고 세 멤버가 호되고 앓는 중이다.
정말 이런 걸 누구에게 줄 수만 있다면 주고 싶다.
아니지, 그보다는 이 고통과 아픔을 어디다 떼어서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고 싶을 지경이다.
다른 날 같으면 남편이 일찍 오든 말든 그다지 기다려지지 않지만 이렇게 내가 아픈 날에는 그래도 옆에 누군가가 있었으면 했다.
9시쯤이면 끝날 거라던 남편은 10시가 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남편이고 뭐고 그저 편안히 잠이라도 자봤으면 싶었다.
한참을 끙끙 앓다가 겨우 눈꺼풀이 가라앉으려는데, 하필이면 그때 남편이 돌아왔다.
물론 나는 잠이 싹 달아났다.
한 번 잠드는 때를 놓쳐버리면 다시 잠들기 어려운 나는, 가뜩이나 온몸이 쿡쿡 쑤셔대고 탱크 열 대가 내 몸을 밟고 지나간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와 그날도 밤새 한 숨을 못 잤다.
사람이 잠들지 못하는 고통을 어디에 비하랴.
머리는 쪼개져서 서로 이리저리 부딪치는 것 같고 끔찍했던 입덧을 다시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려 앉아있을 수조차 없다. 난방을 해도 으슬으슬 한기만 도는데 목구멍은 자꾸 타들어가 아무리 물을 마셔도 쩍쩍 갈라지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 기침을 하면 목 안을 칼로 난도질을 하는 것 같다.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 지었길래 한 번씩 이렇게 호되게 아프게 되는 걸까.
전생까지 갈 것도 없다.
독감예방접종을 하지 않은 죄다.
"다음엔 나랑 애들 독감 예방 접종 해야겠어."
"맨날 그렇게 예방 접종만 할 거야? 그것도 안 좋아. 스스로 이겨내야지."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함부로 말하는 거 아니다,라고 말하는 그 입놀림도 아까웠다.
본인이 밤새 아이들 간호해주고 대신 아파해 줄 것도 아니라면, 나 몸져누웠을 때 죽이라도 쑤어 줄 것도 아니면서 내가 하는 대로 보고 있기나 했으면 좋으련만.
요사이 며칠 아이들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어했었는데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나.
아프면 아픈 사람만 서럽다,이런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란 걸 불현듯 깨달았다.
예방 접종하고 싶은 사람은 하고 하기 싫은 사람은 안 하면 그만 아닌가.
관심까진 바라지도 않지만 간섭이라도 안했으면...
과거 한때 내가 아플 때
"이거 가질래?"
라고 말하면
"응.내가 대신 다 아플게."
라고 대꾸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런 때가, 한창 호르몬의 과다 분비로 앞뒤 안 가리고 말하던 때가 분명히 있었는데.
이 남자가 아니었나?
그 호르몬이 다시 과다분비되긴 어려울 테지.
내년엔 독감 예방접종을 실시한다고 하면 득달같이 달려가 그 따끔한 한 방을 맞아주리.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 세 멤버가 주사 한 방씩 맞고 오는 걸 단 한 멤버만 모르게 남몰래 조용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