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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an 15. 2023

새벽 두 시, 라면 한 그릇 흡입하기 딱 좋은 시간

아내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2011. 1. 11. 그날 밤에도  도쿄에서는...

<사진 임자 = 글임자 >


"나 지금 라면 먹을 건데 두 개 끓일까?"

"난 안 먹어."

"그러지 말고. 끓일 때 같이 끓이게."

"안 먹는다고."

"어차피 내가 끓인다니까."

"일어나기도 귀찮아. 너무 피곤해."

"진짜 안 먹어? 나 혼자만 먹는다, 그럼."

"혼자 많~이 잡솨."


새벽 두 시가 가까워 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일찍 오니까 정말 좋다. 다른 때 같으면 8시에 오면 늦은 것 같았는데 여기서는 9시 전에만 와도 이렇게 좋다."

"정말 아빠 얼굴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그렇지 얘들아? 아빠가 밤에 오면 너희는 자고 있고, 아침에도 일찍 나가니까 너희 자는 모습만 봤는데 말이야."

이제 근무지를 옮긴 지 2주 지났다.

남편 말마따나 미치듯이 바빠서 새벽같이 나가고 한밤중에 들어오기가 일쑤였다.


금요일 저녁 남편은 저녁을 먹고 그야말로 정말 기절했다.

피곤하기도 할 것이다.

저대로 주말 아침까지 푹 자면 쌓인 피로가 조금이나마 풀리겠지, 싶었는데, 나도 그만 세상 시름 다 잊고 기절할 준비를 하는 찰나, 귀신같이 그 시간에 남편이 깼다.

아마 밤 10시가 다 되어갔을 것이다.

불길했다.

나를 잡고 하소연을 할 것이다.

오랜만에 녹슬지 않은 만담 실력을 내게 보일 것이다.


"오랜만에 얘기나 좀 할까?"

"응. 그래. 내일. 날 밝으면."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2주간의 험난한 새 근무지에 대한 감회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 진짜 피곤한데, 책 보다가 너무 졸려서 지금 막 잠드려고 했는데."

"그래도 얘기 좀 하게."

"진심으로 피곤해 나도."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얘기할 시간 없잖아."

맞는 말이다.

주말에도 나가서 일하고 들어오면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최근에 마흔 살의 신생아가 우리 집에 태어나셨다.

물론 내가 낳은 것은 결코 아니다.


"일단 자고 내일 이야기하면 안 돼?"

본인은 잘 거 다 자놓고 애먼 사람만 잠 못 자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넋두리를 할 텐데.

그런 전과가 많으시다.

한두 마디만 대꾸해 주고 맞장구쳐 주고 적당히 끝내려고 하다가도 같이 흥분하고 남편이 종종 겪은 불합리한 직장 생활에서의 대우와 비상식적인 언행을 일삼는 사람들의 뻔뻔함에 대하여 시작했다가 우리나라의 앞날과 점점 세계 경제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기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그나마 운이 좋으면 몇 시간 시달리다가 마무리가 되지만 간혹 처음엔 잘 나가다가 한밤중에 부부 싸움이 일어나기도 한다.

물론 젊을 때 얘기다. 요즘은 나도 남편도 싸울 기운조차 없다.


금요일 밤에도 시작은 미약하였다.

지금 본인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얼마나 고생하는지, 얼마나 고달픈 직장 생활을 하는지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고 나는 '그래그래, 맞아 맞아.'를 연신 내뱉었다.

눕는 순간 최면 걸린 듯 금세 잠드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능력자와는 달리 나는 좀 예민한 편이라 전혀 그렇지 못하다.

몇 시간 실컷 자고 일어났지만 남편은 곧바로 2차 수면에 돌입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그 능력에 대해 나는 존경해 마지않는 바이다.

"거기는 말이야..."

로 시작해서 공무원의 조직에 대해, 의전 문화의 불합리함에 대해, 인간관계에 대해, 전혀 상관도 없는 남의 승진에 대해 남편은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근데 나 정말 피곤한데."

중간중간 내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진심을 전달해도 개의치 않았다.

'그래, 거기서는 누구랑 얘기할 사람도 없고 처음 본 사람들이라 어려워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말도 못 하다가 집에 와서 저렇게 이야기보따리 풀어내는 것이려니.'

 하면서도

'사람이 적당히를 알아야지. 한 밤중에 이게 뭐 하는 거지?'

이런 생각도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루 종일 밖에서 사회생활하느라 고단하게 사는 사람도 있는데 그깟 몇 시간 이야기 상대해 주는 게 뭐 그리 대수랴, 했지만 남편은 은근히 만담꾼 기질을 타고나셨다.

남편의 재롱 잔치는 시작되었다.

내가 이야기를 듣는 건지, 꿈을 꾸고 있는 건지조차 헷갈리게 몽롱한 상태에 이르렀다.

"이젠 그만 자야겠어. 나 잠 못 자면 며칠 힘든 거 잘 알잖아."

"그래. 알았어."

"근데 배가 고프네."

쓸데없이 낄 데 안 낄 데 나서서 대꾸하다 보니 아닌 게 아니라 헛헛했다.

"그럼 라면 끓여 먹을까?"

"아니, 됐어. 너무 피곤해서 일어나기도 싫어."

라면 끓일 때만큼은 남편은 '부부동반' 보다 더한 '라면동반'을 최대한 존중해 주는 편이다.

남편이 먹으려고 끓인 것을 얻어먹는(아니, 뺏어 먹는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겠다.) 그 라면이 그것도 반드시 한 개였을 때라야 더 맛있는 것을 나는 경험 상 잘 알고 있다.

그런 참사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항상 남편은 서 너 번 나의 의사를 묻곤 하는 것이다.


겨우 만담꾼의 올가미에서 벗어난 나는 새벽 두 시가 다 되어서야 설핏 잠이 들었고 너무 늦게 잠자리에 든 탓에 서 너 번 잠에서 깨다가 아침을 맞았다.

다시는 한 밤중에 만담꾼의 올가미에 걸려들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부엌으로 나갔더니,

귀찮아서라도 그 새벽에 라면을 끓이는 일 따위 하지 않을 거라는 내 예상을 깨고 누군가가 먹이를 흡수한 흔적이 역력했다.

저녁에 지은 밥이 많아서 다음 날 아침까지 먹을 수 있겠다, 아침에 늦잠 좀 자도 되겠다 싶었는데 그도 역시 내 예상을 빗나갔다.

밥이라기보다는 밥알이라 불러야 마땅한 것들이 뚝배기 솥 안에 드문드문 붙어 있었다.

절대 남아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양이었다.


착실하게 라면에 밥까지 챙겨 드신 누군가는 기분 좋은 포만감에 토요일 아침 10시가 다 되도록 숙면을 취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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