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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an 20. 2023

며느리의 명절증후군은 저리 가라

아마도, 남편의 명절증후군

23. 1. 19.  그날이 오면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내일은 명절 전날이니까 빨리 끝나겠네?"

"응."

"시장 가는 거 아냐?"

"맞아."

"제발 아무것도 사지 마. 알았지?"

"몰라. 가기 싫은데."

"근데 시장을 어디로 가는지 알아?"

"멀리 가."

"근처로 가는 거 아니었어?"

"아니. 팀장님 고향 근처야."

"뭐야? 그게 말이야 막걸리야?"


저건 먹을 수 있는 막걸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적어도 나와 남편 입장에서는) 일인 것만은 분명했다.

먹지도 못하는 거, 얼토당토않은 거, 기원전 3,000년 전에나 있었음직한 어떤 횡포 같은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명절이라고 재래시장 이용하자는 취지로 가는 건데 뭐 하러 굳이 거기까지 가? 거긴 멀잖아?"

"오늘 팀장님이 말씀하시더라고."

"안 가겠다고 그러지."

물론 하나마나한 소리란 것쯤은 나도 안다.

직장 생활은 하지 않는 나지만 내가 실없는 소리 했다는 것쯤은 잘 안다.

그는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렇게나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다.


"그럼 거기 근처가 집인 사람들만 그리 가고 다시 돌아와야 하는 사람들은 여기 근처에서 볼일 보면 되잖아?"

그렇다.

나도 잘 안다.

이 역시 씨알도 안 먹힐 말이란 것쯤은.

집에서나 나도 호기롭게 내 마음껏 말하고 싶은 대로 다 뱉어내기나 하지 밖에서는 세상 조신하게 시키는 대로만 따를 것이라는 것쯤도 말이다.

"그쪽 근방에 사는 사람이 다수라서 거기 들렀다가 다들 집으로 갈 건가 봐."

"그래도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고 그쪽하고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굳이 거기까지 가야 되는 거야?"

"어쩌겠어. 다들 별 말 안 하는데."

"거기서 '전 안 가겠습니다.'라고 당당히 말했어야지!"

난 정말 잘 안다, 나는 결코 하지 못할 소리를 그에게만 대책 없이 부추기고 있다는 것쯤은.

정작 내가 그 입장이라면 당장 불만스러워도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하여 참아버리고 직장인으로서의 어쩔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라 간주하고 말 것이란 것쯤을 말이다.

6급도 하지 못한 말을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5급에게 7급이 한마디 한단 말인가.


"아니, 팀장이면 다야?"

나는 잘 알다.

팀장이면 다다.

내가 아무리 콧바람 씽씽 불며 흥분해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아주 잘 안다.

너무 많은 것을 아는 나는, 어쩌면, 천재인지도 모른다.


명절을 앞두면 공무원들이 갑자기 재래시장을 찾는다.

나도 근무할 때 윗분들이 시장 보러(?) 가시는 것을 보았었다.

정말 시장을 보러 가시는 건지 재래시장 체험활동만 찰나에 하고 오시는 건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래도 사무실로 돌아오실 때는 하다못해 직원들 주시려고 삶은 옥수수라도 들고 오시곤 했었다.

빈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아랫분들은 착실히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민원인에게 봉사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자리를 지켜야 했다.

나는 정말 시장 구경을 좋아하고 그 누구보다도 재래시장 활성화에 막대한 기여를 하고 싶은 의지가 있는 직원이었으나 아무도 나를 데리고 가지 않으셨다.

심지어 6시까지, 마지막 문단속을 할 막중한 의무를 지고 끝까지 일선행정에 몸담아 왔었다.

윗분들과 재래시장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인데 느닷없는 팀장님의 고향 근처까지 굳이 가야 하다니.

갔다가 다시 또 운전해서 집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새아침이 밝기도 전에 그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물론 정말 그 먼 곳까지 시장을 가게될지 어쩔지는 닥쳐봐야 아는 일인데 남편 혼자서 끙끙 앓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시장 구경 내가 가면 안 될까? 나 정말 자신 있는데. 어차피 자긴 물건 볼 줄도 잘 모르잖아. 괜히 엉뚱한 거나 사면 안되는데 말이야. 남들이 산다고 절대 절대 따라서 사지 마. 진심으로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또 분위기에 휩쓸려 가지고 옆에서 부추긴다고 별생각 없이 쓸데없는 거 집어 오지 마. 집에 이미 쟁여져 있는 거 내가 미리 리스트 알려줘도 또 이중으로 사는 거 자기 특기잖아. 우리 집에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리고 필요한 게 있더라도 내가 직접 살 거야. 그러니까 조신하게 따라다니기만 해. 정말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나한테 꼭 미리 물어봐야 돼. 알았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거 이상한 거 살 돈 있으면 차라리 나 줘. 과자나 사 먹게. 그리고  뜨내기라고 바가지 씌우는 데도 있어. 양심적인 사람도 많지만 불량한 사람도 많은 세상이야. 많이 당했었잖아? 그리고 싸다고 사라는 것도 절대 사지 마. 알고 보면 싼 것도 아니야. 알지? 그리고 싼 지 어쩐지 그런 감도 못 잡잖아. 딱 보면 자긴 뜨내기 같아. 좀 허술하게 보인다고. 알았지? 절대 허술하게 행동해선 안돼. 현지인처럼 행동해. 그리고 말을 최대한 아껴. 입 여는 순간 외지인 탄로 나는 거야. 그 정돈할 수 있겠지?"

라고는 또 말하지 못했다 물론.


단속한다고 해서 단속되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새겨듣지도 않을 게 뻔하다.

그는 지금 질풍노도의 마흔 하고도 한 살이나 더 먹었다.

할 한마디 잘못했다가 엇나가면 큰일이다.


그동안 내게 미리 언질도 주지 않고 내게 칭찬받을 요량으로(물론 거의 항상 내게 핀잔만 듣기 일쑤였다.) 득의양양하게 얼토당토않고 아무짝에도 쓸모없으며 이미 집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는 그 어떤 물건들을 들여온 그의 전과를 하나 둘 떠올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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