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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an 25. 2023

시보도 떼기 전에 신규자가 일잘한다는 소리를 다 들었다

특출 나지 않은 신규자가 재능기부를 하는 법

23. 1. 24. 오가며 눈치운 길을 지나노라면  

<사진 임자 = 글임자 >


"생각보다는 일을 잘하네? 보기엔 이런 일 하나도 못할 것 같은데 말이야."

"아, 네. 전에 많이 해 봤어요."

"그랬어? 그래도 생각보다 잘하네."


"공무원 시험 떨어지면 농사짓던 부모님 일손 도와드리러 바로 출동했었어요. 어중간하게 시험공부하다가 자꾸 떨어져서 농사일만 더 많이 배웠어요. 삽질 이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집에서 맨날 하던 게 삽질인 걸요 뭐. 그뿐인가요? 다른 일도 좀 해요."

라고는 주제넘게 나서며 얘기하지 않았다, 물론.

시보를 떼려면 몇 달이 더 남았었다.

아직은 내 실체를 다 드러 내기엔 일렀다.


이렇게 폭설이 내리던 날이었던가?

발자국을 떼면 신발이 눈에 푹푹 파묻히던 날이었다.

바야흐로 공무원 생활 3달째 접어들고 있었다.

물론 나는 당시에 공무원들이 그런(?) 일까지 하는 줄은 전혀 모르던 백면서생이었다.

홍수에 비상근무, 가뭄에 비상근무, 명절에 비상근무, 봄과 가을에 산불 비상근무, AI 비상근무, 구제역 비상근무, 최근에는 그 유명한 코로나 비상근무까지(선거나 축제나 각종행사에 동원되던 것들은 차치하고라도),  비상근무의 꽃을 활짝 피우던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에 비하면 폭설에 쌓인 면사무소 앞 눈 치우기는 애교 수준이었다.


처음 공무원 발령을 받고 근무하기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눈이 많이 내린 어느 겨울날이었을 것이다.

아침에 출근하니 직원들이 도착하자마자 평소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먼저 산불복을 입었다.

그리고 다들 면장갑을  꼈다.

어떤 이는 삽을 양손에 들었고 또 다른 이는 (대나무로 엮어 만든 것 같은) 기다란 빗자루를 들고 일제히 면사무소 밖으로 바삐 나갔다.


"임자 너도 얼른 준비해라."

"네? 무슨 준비요?"

"면사무소 앞에 눈 치우러 나가야지. 얼른 장갑부터 껴. 춥다."

"그런 것도 해요?"

"그런 거고 저런 거고 공무원은 다 하는 거지. 몰랐어? 얼른 나와."

네, 사실은 정말 몰랐어요.

진심으로 상상도 못 했어요.

누가 알려 주지도 않았고요.

나도 참, 왜 그렇게 눈치가 없었나 모르겠다.

그만큼 공무원의 세계에 무지의 극치를 달렸던 게 아닐까 싶다.


"비실비실해 보여서 삽 하나도 못 들 줄 알았더니 삽질을 나보다 더 잘하네!"

저렇게 말씀하신 분이 면장님이셨던가?

사람은 외모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내가 덩치가 크고 힘 있어 보이는 외관은 아니지만 시골 태생에 그동안 농사일을 도운 경험으로 보면 어지간한 남자들이 삽질하는 것보다는 더 잘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침대는 과학이고, '삽질은 요령이다.'

나는 그 심오한 진리를 일찍이 터득한 사람이다.

돌잡이에서 아기가 본능적으로 제가 내키는 것을 잡아 쥐듯 신규자는 튼실한 삽 하나를 냅다 집어 들었다.

'겨울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  그 겨울아이가 다 컸고, 면사무소로 첫 발령을 받은 신규자가 해야 할 일은 그것이 전부였다.

자고로 삽질이란 것은 무식하게 힘만 주고 덤벼서는 소득이 없다. 눈송이 하나하나는 새털 같아도 쌓이고 쌓이면 시설물도 폭삭 주저앉게 만들어 버리는 요망한 것이기도 하다.


눈이 뭉쳐지면 무거운 당연한 이치를 생각하고 그동안 단련된 삽질의 노하우를 한껏 발휘하며 나는 시보도 떼기 전에

"신규자가 일도 잘하네."

라는 칭찬을 들었다.

삽질도 오래 하고 볼 일이다.

직원들의 칭찬은 신규자가 그 신분도 잊고 더욱 삽질에 매진하도록 하는 결과를 낳았다.

모르긴 몰라도 여직원들 사이에서는 단연 내가 삽질로는 우뚝 섰다고 자신할 수 있다.

 새로 발령받아 간 곳에서 삽을 들 때마다 이를 거듭 확인하곤 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겨울에 스키장갑을 비상용으로 차에 싣고 다니기 시작했다.

자고로 삽질할 땐 스키장갑이 제격이었다.

나는 아마도, '일행직'이 아니라  비밀리에 '삽질직'에 임용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규자가 일을 잘한다고 칭찬받을 영역은 면사무소 앞에서 삽질하며 눈을 치우는 것이 아니라 사무 분장표상 맡은 업무를 척척 잘해나가야 할 그것이었다.

뜻밖에도 나는 엉뚱한 곳에서 나의 숨은 진가를 발휘하고 말았다.

그 밖의 다른 재주는 없었다, 물론.

눈에 띄게 아주 사회성이 좋다거나 말주변이 좋다거나 업무적으로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하다못해 남들도 다 하는 입에 발린 소리 하는 일 그마저도 나는 젬병이었다.

안타까울 뿐이다.


방문해 오는 민원인이 요구한 일에는 재깍재깍 반응해서 속 시원히 일을 처리해 주지는 못했을망정 단순 무식하게 힘이라도 썼어야 했던 시절이다.

신규자의 엉뚱한 재능 기부,

그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일까?

근평에는 실수로라도 기록되지 않을, 전혀 상관없을 그런 능력 혹은 나만의 장기자랑 같은 것.

연휴 막바지부터 폭설이 예고되고 전국적으로 한파가 몰아친다는데 분명히 어딘가에서 많은 이들이 고생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옛날, 땀이 나도록 삽질을 해대며 눈을 치우고 난 후 전 직원들이 사무실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씩 마시던 때가 있었다.

원두커피가 무엇이고 투 샷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어도 근무시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시골 면사무소에서 한 봉지씩 타 먹던 달달한 믹스커피 향기를 홀짝이던 그날의 아침을 나는 잊지 못한다.

직원들의 모습도 눈에 선하게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언제나 도움을 요청하면 신규자라고 신경 써 주고 잘 알려주던 정 많고 좋은 분들이셨는데...


첫 발령지, 그곳은 첫사랑처럼 언제나 아련하고, 결국엔 조용히 녹아내리는 눈처럼 애틋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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