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Feb 05. 2023

남편의 직렬은? 쇼핑직 혹은 기사직

23. 2. 1. 운전을 위하여

< 사진 임자 = 글임자 >


"솔직히 말해. 자기 교육행정직 맞아?"

"무슨 소리야?"

"그동안 나 속여 왔지?"

"내가 뭘?"

"정체가 뭐야 도대체?"

"또 무슨 소리야?"

"직렬이 그 직렬이 아닌 것 같아서 그래."

"그럼 뭐 같은데?"

"쇼핑직 아냐? 아니면 기사직?"

"아, 맞다. 사실 기사직이야."


가끔 이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진심으로 궁금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보기엔 쇼핑직과 기사직을 겸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몰래, 아니지, 나만 알게 그는 겸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겸직 금지의 의무'를 위반했다.

어디에 신고를 해야 하나?


"또 뭐가 왔던데?"

"응. 그거?"

"쇼핑직이 확실해."

"다 필요해서 샀지."

"'호올수' 도매상 차릴 거야?"

"자기도 먹고 하라고 많이 샀어."

"뭐 하러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사냐고!"

"내가 운전 다 하잖아. 졸리니까 잠 깨려고 그러지."

출장을 갈 때마다 남편은 '기사'가 되었다.

뿐이랴 회식 때, 구내식당을 두고 굳이 잠깐 나가서 사 먹는 점심시간에도 충실한 기사가 된다.

차를 두고 온 높으신 분의 퇴근길에도...

며칠 전 낮에도 윗분들을 착실히 모셔다 주고 점심시간에 내게 전화를 해 왔다.


"내가 그렇게 목 아파서 고생할 때 그때 샀어야 되는 거 아니야, 나를 그렇게 생각하셨으면?"

"많이 있으니까 많이 먹어. 무슨 맛으로 줄까?"

"내가 레몬 맛 좋아하는 것도 여태 몰랐어? 됐어!"

남편이 씻는 동안 '레몬맛' 한 움큼을 집어 왔다.

옆에 나란히 놓여 있던 '아이스 블루맛'이 서운해하길래 그냥 지나치는 것은 그 맛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으므로 이내 한 움큼 또 집어 들었다.

9개씩 들어있는 한 통이 한 가지 맛당 20통,이게 한묶음이다.두 가지 맛이니까 자그마치 360알.

대량으로 할인해서 파는 코인 육수 저리 가라다.

예로부터 갱년기에는 호올수라고 했겠다.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던 어미'마냥 최근에 레몬맛 사탕이 그렇게도 먹고 싶었다.

자고로 나는 편애라고는 모르는 사람, 이라고 자부하는 편이었으므로 공평하게 한 움큼씩이다.

'답답한 속을 시원하게~', '호올수'는 광고하고 있었다.

출근은 하지 않지만 나도 속이 답답할 때가 있다.

어머, 이건 내가 매일 상시 복용해야 해!


그러니까 남편은,

내게 일용할 주전부리를 주시옵고,

선호하는 맛을 간택할 권리를 선사하시었으며,

다만 나는 이를 섭취할 따름이니라.


"하여튼 뭐 사면 나보고 뭐라 하면서 자기가 제일 잘 먹는다니까."

"안 샀으면 안 먹지. 샀으니까 먹는 거지. 그리고 사서 안 먹을 거면 뭐 하러 사?!먹으려고 산 거 아냐?사 놓고 모셔 두려고 했어? 난 그냥 있으니까 먹는 거야."

말인지 막걸리인지 모를 말을 횡설수설하며 레몬맛 하나를 입에 넣었다.

음, 역시 내 스타일이군.


다음날 남편이 출근을 하고 난 후 몇 개를 더 집어 왔다.

퇴근 후 남편이 정색했다.

"어? 이거 왜 이렇게 줄었지? 누가 다 먹었어?"

"내가 먹었다."

먹을 사람이 나 밖에 없을 거란 걸 빤히 알면서도 그는 굳이 확인하고 싶어 하는(어쩌면 쇼핑한 보람을 찾고자 하는 뿌듯함) 못된 습관이 있다, 고 나는 생각했다.

"아무튼 너희 엄마는 아빠가 뭐 사면 산다고 뭐라 하면서 꼭 제일 잘 먹는다니까."

아이들은 관심도 없어하는 것 같은데 저 말도 결코 빼놓지 않는다.

밤마다 '호올수 수불 대장'이라도 작성하고 있는 건가?

무던한 성격의 그였지만 어쩔 때 보면 예리한 구석이 다 있다.


윗분들을 모시고 운전할 일도 없는 나는 매일매일 영양제 챙겨 먹듯 남편이 출근을 하고 나면 그 레몬맛과 아이스 블루맛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아직 남편은 개시도 안 한 것을.

이러다가는 내가 남편 대신 대리기사로 나서야 할지도...

늦게 배운 도둑질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벌써 몇 통을 비웠는지 모른다.

이쯤에서 멈춰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시보도 떼기 전에 신규자가 일잘한다는 소리를 다 들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