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바람대로 아침 일찍 출발했다.

우리 내외는 11시 30분에 출발했다네.

by 글임자
23. 1. 21. 고향 가는 길

<사진 임자 = 글임자 >


"내일 아침엔 일찍 출발하자. 일찍 가야 일찍 오지."

"일찍 가는 거랑 일찍 오는 거랑은 별로 상관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일찍 집에 가면 다음날 이른 점심 먹고 올 수 있지."

"그건 본인 생각이시고. 가 봐야 아는 거지."

"아무튼 일찍 가게 준비해. 알았지?"


남편은 대단한 새해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일단 아침이 밝아봐야 아는 일이었고, 사람 일이란 게 늘 계획대로만 되는 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다.


"일찍 출발할 거라며? 준비 안 해?"

"응. 해야지."

벌써 오전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지난밤의 태도만 보면 새벽 첫차를 타는 사람들보다도 더 선구자가 되어 고속도로를 달릴 것 같았다, 고 나는 생각했다.

입은 일찍 가야지 일찍 출발해야지 노래 불렀지만 그의 육신은 소파에서 망부석처럼 요지부동이었다.


"도대체 언제 준비할 거야?"

"난 5분이면 돼. 금방 준비하니까."

"세수는 했어? 갈 거면 준비를 해야지."

"난 금방 한다니까. 걱정 마."

정작 본인은 고향에 갈 준비를 전혀 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으나,

"얘들아. 얼른 준비해라. 일찍 출발해야지."

"본인이나 준비하시오. 머리는 감았어?"

"난 금방 해."

내가 설거지를 마치고 청소를 마칠 동안 변하지 않는 한결같은 태도로 일관했다.

이상하다?

우리집 가는 게 아니라 남편집 가는 건데?


"일찍 간다는 사람이 뭐 하고 있어? 오늘 중으로 갈 수 있는 거야? 일찍 간다는 말이나 하지 말든가."

"걱정하지 마. 얘들아. 얼른 준비해라, 얼른."

웬일로 오늘 8시 전에 일찍 일어난 것 같아 뭔가 본때를 보여주나 싶었는데, 내가 깜짝 놀랄까 봐 본때를 보여주지는 않기로 한 모양이다.


"얘들아, 10시 반에는 출발하자."

남편의 마지노선은 10시 30분이었던가 보다.

일찍 출발하자는 그 말에 나 혼자만 부산 떨고 조바심을 냈지 그런 말을 한 당사자는 세상 여유로워 보였다.

애초에 그의 마음속에서 '일찍'이란 말의 의미는 그 시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님이 사라는 건 다 샀다. 이제 가자."

"그래도 과일이라도 사야 하는 거 아냐?"

"내가 어제 말할 때는 콧방귀도 안 뀌더니 이제야 그런 말 해?"

"어떡하지?"

"어떡하긴. 사야지. 과일 살 마음이 있었으면 내가 말했을 때 미리 사놨어야지.아님 나보고 미리 사 두라고 하든지."

"지금 사러 가면 되지 뭐."

돌고 거슬러가서 전에 자주 애용하던 과일 가게로 향했다.


사과를 살 요량으로 부랴부랴 달려갔으나 이미 11시를 훌쩍 넘긴 때라 진작에 물건이 다 나가고 없단다.

아쉬운 대로 배 한 상자를 샀다.

"용돈 드릴 거랑 애들 세뱃돈 줄 건 찾았어?"

"아니."

"뻔히 갈 줄 알면서 미리 안 찾았어?직접 안찾을 거면 나한테 미리 좀 찾아 놓으라고 하지 그랬어?"

"지금 찾으면 되지."

"여긴 농협밖에 없는데?"

"어? 난 농협카드 없는데."

숨을 쉬는 당연한 생명활동만큼이나 자연스러운 반사작용으로 내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는 금요일에 남편이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최소한 다른 때보다 두세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을 것이란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른 귀가 후 지인과 가볍게 당구 한 게임을 했다는 것도 안다.

퇴근 후의 남편의 행적을 추적해 보면 나머지 비는 시간 동안의 수수께끼가 묘연하다.

한두 시간 정도 비는 그 시간에 그는 누구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두 시간 정도면 사과 씨앗을 뿌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은 후 수확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은행 ATM에서 만 원권 짜리 지폐 백 장을 백만 수물두 번 정도는 입금했다 인출했다 하는 잔망스러운 짓을 충분히 할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미 다 지난 일이요, 누굴 탓할 일이 못된다.

시가에 아침 일찍부터 가서 불편하게 있을 아내를 생각해서 최대한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리라.

아내를 끔찍이도 사랑하는 그만의 애정표현이라고나 할까?

깜찍하다 못해 정말 끔찍하다.

아, 나는 행복한 왕자보다도 더 행복에 겨운 세상 행복한 사람...


비로소, 혹은 새삼스럽게 나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고,

오전 11시 전에 단골 과일가게 향한 인간이 원하는 과일을 'get' 한다.

이렇게나 한꺼번에 많은 것을 알아버려도 괜찮은 걸까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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