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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Jan 27. 2023

하마터면 슬리퍼 신고 결재받으러 갈 뻔했다.

제지당한 자의 안도감

23. 1. 26. 모르는 건 한 단계씩 밟고 오르기

< 사진 임자 = 글임자 >


"너 그거 신고 결재받으러 가려고 그러냐?"

"네??"

"신발 어디 있어?"

"무슨 신발이오?"

"면장님께 결재받으러 가면서 슬리퍼 신고 가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냐?! 얼른 구두로 바꿔 신고 가라!"


당시 162cm의 평균(은 된다고 믿고 싶었다.) 여자 키인 나를 3cm 정도 높여주었던, 앞이 시원하게 뚫린 나의 첫 반려 실내화에서 나는 즉시 내려와야만 했었다.

그것도 몰랐다.

윗분께 결재를 받으러 가는 아랫분은 아무 신발이나 신고 알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이다.


발령을 받고 공직세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나는 작고 사소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 모든 면에서 일일이 지적당하고(나쁜 의미의 지적이 아니라) 가르침도 받고 그에 따라야만 했다.

"다음부터는 편하게 신고 일할 실내화 한 켤레 챙겨 와. 면사무소에서 하루 종일 구두 신고 일할 수는 없잖아."

첫 출근을 하고 또각또각 뾰족구두 소리를 내며 청소년이 현장 체험 학습을 나온 것처럼 사무실 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순찰하던 내게 어느 분이 말씀하셨다.

아닌 게 아니라 구두는 신을 게 못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실내화는 물론 운동화도 한 켤레 비상용으로 챙겨 와 내 자리 책상 밑 깊숙한 곳에 신줏단지 모시듯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논, 밭으로 출장을 가거나 산을 타기 위해서 등산화 비슷한 것도 추가로 구입하기에 이르렀다.

훗날 갑작스러운 산불 발생으로 급히 신발을 갈아 신고 등짐펌프를  지고 산불진화(명목은 그러했지만 그 힘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를 위해 출동할 때면  (나름) 철두철미 했던 준비성에 보람마저 느꼈다.

지방직 공무원이라면(특히나 시골 면사무소 직원이라면) 누구나(혹은 나만 해당되는) 갖춰놓는 3종 세트라고나 할까?


언젠가 우연히 어느 직원의 차 트렁크에서 면장갑과 운동화와 등산화와 그 밖의 직업 특성상 갑작스러운 출장에 대비하기 위한 일종의 필수품들을 보았다.

차가 있는 직원들의 트렁크는 대개가 그랬다.

나는 신규자 시절부터 그 후 5년이 넘도록 자가용을 장만하지 않았으므로 필요한 물품이 생기면, 야금야금 야반도주를 꿈꾸며 하나둘씩 생필품을 모으듯 군내버스를 타고 사무실로 나만의 생필품을 나르기 시작했다.

정말 다들 출근할 때 신는 신발은 얌전히 책상 아래 두고 사무실에서는 실내화를 신고 있었다.


시집가는 색시가 혼수 장만하듯 심혈을 기울여 시장에서 실내화를 한 켤레 샀다.

물론 누군가가 그마저도 못마땅해하며 지적하기도 했다.

무난해야 한다.

요란하면 못쓴다.

시골 정서에 반해서도 아니 된다.

공무원 신분에 어긋나면 안 된다.

게다가 나는 신규자였다.


실내화 한 켤레조차도 내 취향 따위는 최대한 반영하지 말았어야 했다.

연세도 있고 공직 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에게는 물론 해당사항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도 5년, 10년이 지나면 내 취향이란 것을 아주 살짝 반영해 볼 수 있을 것이었다.

반짝반짝 큐빅도 아닌 것이, 스팽글도 아닌 것이, 불분명한 소재의 화려한 어느 분의 실내화를 곁눈질로 내려다 보며 아득한 나의 5년 후를 잠시 꿈꾸었다.


하루는 면장님께서 직접 2층으로 결재받으러 올라오라고 하셨다.

그것도 내 자리로 직접 전화하셔서 말이다.

그냥 차라리 면장님이 1층으로 내려오시는 건 어떨까, 나 혼자만 속으로 생각했다.

면장님은 1층에 계실 때도 있었고 2층 면장실에 계실 때도 있었다.

1층에 계시면 지은 죄도 없이 괜히 불편하고 자유롭지 않다.

평소엔 1층에 잘 계시더니 갑자기 2층으로 올라가셔서 나를 호출하셨다.

아무 생각 없이 옆에서 시키는 대로 결재판을 챙겨서 나가려고 하는데 옆의 주사님이 나를 강력히 제지하신 것이다.

"면장님께 결재받으러 갈 때는 실내화 신고 가면 안 된다. 구두로 얼른 갈아 신어라."

나는' 실내화'라 했고, 그분은 끝끝내 한낱 '슬리퍼'라고 고집하셨다.


사소한 것 같지만 그곳에서는 그마저도 아주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종가의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엄격한 종부의 도리를 전수받듯 나는 또 하나를배웠다. 

딴에는 또 그렇기도 하다.

실내화 끌고 가서 결재받는다고 생각하면 딱히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상황이 뭔가 조금 그렇기도 하다.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그리하여 나는 임용 첫날 친척분과 같이 방문한 어렵기만 한 면장실을 두 번째로(이번엔 기특하게도 혼자) 방문하기에 이르렀다.


면장님이 1층에 계실 때는 다른 직원들도 그냥 신던 실내화 그대로 가서 결재를 받았던 모습을 유심히 챙겨 봤었다.

신규자는 무능력자였으므로 눈치라도 있어야 했다.

1층용 결재, 2층용 결재가 따로 있던가 보았다.

1층에서는 허용되지만 2층에서는 용납되지 않는 그 어떤 것 말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신규자는 모르는 것 투성이니까 교육시키느라 그러신 것 같았다.

별 일 아닌 것 같아도 그렇게 짚어 가며 누가 알려주지 않는다면 업무 인수인계서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간과하고 실수하기 쉬운 그런 것들을 말이다.

물론 그 후에 근무하면서도 급히 결재받을 일이 있으면 정신없이 신고 있던 실내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섰던 적도 있었다.

그러면 누군가가 친절히도 반드시 지적해 주는 것이었다.


그 신규자 시절의 나는 마치 3월에 갓 입학한 초등학생 같았다.

담임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상황이기도 했거니와) (공직생활에 대해서는) 순진한 어린아이 말이다.

어쩌면 모르는 것은 묻고 배우고 익혀야만 하는 것이 세상의 당연한 이치다.

또 한 번 그 면사무소의 모든 분들에게 새삼스럽게도 고마운 마음이 샘솟는다.

아이 한 명이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한 것처럼, 철없는 신규자를 키우기 위해서는 면사무소의 모든 직원들이 동원되어야 했던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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