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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Feb 14. 2023

'보고 또 보고', 공무원의 주간업무

저는 주간업무가 뭔지도 모르는걸요.

23. 2. 13.  

< 사진 임자 = 글임자 >


"임자씨, 주간 업무 오늘 2시까지 주세요."

"네?"

"오늘 퇴근 전에 보내야 하니까 그때까지 줘야 돼요. 서식은 메일로 보냈으니까 작성해서 주세요."

"..."

그러니까 그 주간업무가 대관절 뭣이간디 갑자기 이러세요?

메일은 그때까지 한 번도 열어 본 적도 없었다.

수신 메일을 확인하고 나는 물론, 이소리가 다 무슨 소린고? 했을 뿐이었다.

한글은 한글이로되 도통 뭐라는 줄 모르겠다.


내가 첫 발령받은 날은 화요일이었다.

그리고 '주간업무' 자료 요청을 받은 것은 고작 이틀 뒤인 목요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제 겨우 면사무소나 제대로 찾아오고(물론 정해진 군내버스를 타고서만 가능한 일이다. 중간에 내려서 찾아오라고 하면 내 직장도 결코 찾아내지 못하고 미아가 되어 파출소로 향하게 될 것이었다.) 내 자리나 익히고 새올 시스템이나 좀 구경한 지 3일째란 말이다.

주간업무라,

뭔가 중요한 것 같기는 하다.

허투루 들을 일도 아닌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다짜고짜 신규자에게 내놓으라니.


"주사님, 저,,, 총무계에서 주간 업무 주라는데요?"

내일모레 계장님이 되신다는 분께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아, 그거? 너는 뭐 낼 거 있냐?"

사무분장표에 서명하라고 해서 하긴 했지만 내 일인지 네 일인지도 아직 가닥 못 잡고 있는 신규자는 본인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을 게 뻔한데 이게 무슨 해괴망측한 말씀이시란 말인가.

복지계장님 한 분, 저 주사님 한 분, 그리고 내가 발령받은 첫날부터 휴가 중이셨던 주사님 한 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이렇게 총 4명으로 구성된 그곳에서 솔직히 나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자기 비하가 아니라 당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신규자였을 테니까.)고 느꼈다.

나는 모든 직원들에게 많은 것들을 배워야만 하는 사람이었고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고작 점심밥만 내 손으로 떠먹을 줄 알았다.


출장 내는 일조차도 몇 번을 설명 듣고(새올이란 요망한 시스템이 처음엔 어려웠다, 나만 그랬나?) 해도 자꾸만 엉뚱한 기안을 올리곤 했으니까 말이다.

분명히 나는 한글을 알고 컴퓨터도 쓴 적이 있는 요즘 사람이지만(아니, 옛날 사람인지도 모른다.) 한꺼번에 여러 시스템의 사용 권한을 받고 이런저런 내용을 익히다 보니 뒤죽박죽 섞여서 이 시스템이 저것 같고, 저 시스템이 이것 같고 헷갈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복지계 업무는 용어도 다 비슷비슷하고, 사용하는 시스템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모든 시스템들은 요사스러운 것이면서도 똑똑한 것들이었다.

나의 실수를 귀신같이 찾아내고 잘못 입력한 무언가는 재깍 지적해 냈다.


주간업무는, 그러니까 매주 금요일이 되기 전(읍, 면장님들이 돌아오는 월요일에 군에 가셔서 보고할 내용들)에 각 계에서 현안 업무, 그 주에 했던 주요 업무, 다음 주에 있을 예정인 업무 등등을 모아 총무계 서무에게 넘기면 그곳에서 취합해서 군으로 보고하는 형식이었다.

나는 주간 업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낼 만한 무엇인가가 있었을까?

있어도 없다.

아니,

몰라서 있어도 없다.

아, 공무원은 정말 민원실에서 등, 초본 떼어 주는 일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시간이 갈수록 그 세계에서는 보고와 보고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였던가?

한창 인기를 끌었던 일일 연속극 '보고 또 보고', M사에 그 연속극이 있었다면, 공직 세계에서도 나름의 '보고 또 보고'가 존재한다.


내게 주간업무를 요구했던 그 서무 주사님은 아침에 자료 요청을 해 놓고 내가 오후 2시가 넘어가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깜빡한 건가?

내가 아무것도 안 줬는데 왜 달라는 말을 않지?

안 줘도 되는 건가?

뭘 알아야 주지.

이대로 은근슬쩍 넘어가는 건가?

그러면 좋겠지만, 설마, 그럴 리가...

어떤 위기를 모면했다고 나 혼자만 느꼈다.

하지만 그 서무 주사님도 하루 이틀 일한 것도 아닌데 그냥 넘어갈 리가 있나.

내 옆의 주사님이 알아서 자료를 다 작성해서 진작에 넘겨주셨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한참 후에

"너 복지계 주간업무 제출했냐? 그거 안 주면 큰일 나는데 어떻게 했어? 제출 안 하면 오늘 너 퇴근 못해."

이렇게 시치미 떼고 내게 물으셨다.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려고 장난 좀 치셨다는 거다.

주사님, 처리하셨으면 하셨다고 말씀이라도 해 주시지, 저 혼자 얼마나 마음 졸였다고요.


기원전 2,000년 경 상대가 원하는 그 시간에 자료를 제출하지 못하면 큰일 나는 줄 알고 벌벌 떨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그랬던 신규자가 임용 6개월 만에 시보도 떼고 시간이 흐르자,

"주간업무, 꼭 그때까지 안 줘도 되죠? 어차피 더 있다가 제출할 거잖아요. 우선 다른 계에서 먼저 받아서 정리하고 계세요."

라며 엇나가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었던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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