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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r 07. 2023

어느 신규자의 반려 물품, 업무일지

무조건 받아쓰기했어요.

23. 3. 6. 내 것 아닌 업무일지

< 사진 임자 = 글임자 >


"임자씨. 잠깐 이리 와 봐."


출근을 시작하고 종종 나는 계장님과 면장님께 불려 갔다.

어슴푸레하긴 하지만 최대 호출자는 계장님과 면장님이셨다.

뭘 몰라서도, 아직은 지은 죄도 없을 신규자였지만 예상치 못한 윗분의 호출은 부담스럽고 어렵고 긴장되는 일이었다.


"이거 업무 일지니까 챙겨 두세요."

그것은 공무원증보다도 더 반가운 물건이었다.

각종 사무용품 세례를 받긴 했지만 업무 일지만큼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었다.

비로소 직장인이 된 기분이었달까?

보통은 연초에 새로운 업무일지를 받지만 나는 9월에 발령을 받았기 때문에(운이 좋아 다행히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근무를 해 보니 휴직을 하고 중간에 복직을 하게 되면 안타깝게도 업무일지 구경도 못하는 수가 있었다.) 앞으로 서 너 달 정도밖에 사용하지 못할 것이었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입학한 1학년이 새 학용품에 제 이름을 깊이 새기듯 나는 업무 일지에  내 이름 석 자를 선명히 적고 얼마나 뿌듯했던가.

공무원증보다도 그 업무일지에 소속감을 더 느꼈다.

몹시도 소중한 나머지 하마터면 커버까지 씌워줄 뻔했다. 그 옛날 새 교과서에  달력으로 옷을 입히듯이.(또 한 번 나는 옛날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임자씨, 바쁜가? 잠깐 이리 와 봐요."

제대로 된 일은 못하고(아마 하는 시늉만 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겨우 사고나 안 치는 수준에서(사고를 쳤어도 친 줄도 몰랐겠지 아마.) 자리만 지키고 있을 때 계장님이 부르셨다.

이때 신규자의 필수품은 업무 일지다.

본능적으로 나는 알아차렸다.(혹은 나만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것이 이렇고 저렇고, 이래서 저래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뭔지는 알아듣지도 못했다 물론.

무작정 들리는 대로 받아 적기만 한 것이다.

아,

받아쓰기는 초등학교 저학년들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20년 만에 받아쓰기를 하는 기분이라니.

무조건 받아 적고 보는 것이다.

나중에 갑작스레 쪽지시험이라도 보자고 하시면 대략 난감할 일이지만 여태 직장에서 신규자가 받아쓰기 시험을 본다는 흉흉한 소문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걱정할 게 없었다.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고 무슨 소린지 모르겠으면 (그럴 주변머리도 없었으면서) 여쭤보면 되겠지.


나중에 들춰보면 내가 적었지만 무슨 말을 적어 놓은 것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부분 면사무소 복지계 업무와 관련된 일이었지만 용어 자체도 내겐 생소했고 앞, 뒤 맥락도 없이 받아 적기만 했으니 제3세계 음악보다도 난해한 것이 바로 내가 휘갈긴 각종 메모, 그것이었다.

"자, 그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그치?

"네."

"저번에 그건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 응?"

"네."

나는 제법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아니, 할 줄 아는 대답은 그뿐이었다.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처음부터 언제나 호출을 당하면 업무일지를 챙기던 버릇이 있어서(그런 직장 생활은 처음 해 보는데 어쩜 매번 챙길 생각을 했는지 내가 다 기특할 정도였으나) 착실히 그 '반려일지'를 챙겼으나 윗분들이 보시기엔 실속 없어 보이셨던가 보다.

"임자씨. 그거 안 가져와도 돼. 그냥 얼른 오기나 해! 그런 거 없어도 돼. 빨리 와!"

급기야 계장님께서 업무 일지에 대해 분리불안이 심히 있는 나를 과감히 그것으로부터  떼어놓으셨다.

매번 볼펜과 그것을 챙기느라 뭉그적거리는 내가 답답하셨나 보다.

받아 적기만 하면 뭐 하나 내용이 뭔지도 몰라, 앞뒤 맥락도 없어, 결정적으로 내가 쓴 것도 못 알아봐...

몰라서 그랬어요,

불안해서 그랬어요.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학생이 학용품 욕심만 넘치듯, 어떤 신규자는 업무일지의 메모 내용만 믿었다.

공직생활 물정  모르는 신규자에게는 만능 전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노라고.

다른 직원들이 새로운 무언가를 알려주실 때도 역시 그 반려 물품을 반드시 챙겨 받아쓰기 바빴다.

채점은 결코 하지 않는 받아쓰기,

만에 하나 누군가에게 검사 맡고 채점까지  했더라면 퇴근 시간도 훌쩍 넘긴 채  잘못 받아 적은 내용들을 몇 번이고 고쳐 쓰는 수모를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것만 들여다보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을 줄 알았다.(는 것은 어리석은 신규자만의 착각일 뿐이었다.)


업무 일지에 무던히도 집착했던 초초초신규자 시절, 모든 게 서툴렀고 업무 면에서도 세상 무지했지만, 그래도 어떤 의욕은 남달랐던 어느 서른 살 신규자 한때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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