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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r 25. 2023

면사무소로 발령받은 신규자의 전화 공포증

처음부터 많은 걸 알 수는 없잖아요.

23. 3. 1. 호랑이보다 곶감보다 더 무서운 것

< 사진 임자 = 글임자 >


"감사합니다. 브런치면사무소 글임자입니다."


나 말고는 전화를 받을 사람이 없었고, 게다가 전화벨이 울린 곳은 내 자리였다.

최대한 버티다가 마지못해 받았다.

송수화기를 잡는 내 손이 달달 떨렸다는 걸 본 사람은 없었지만(내게 관심 갖는 직원 한 명도 없었건만) 주위를 의식했다.

전화선이라도 뽑아 버리고 싶었다.

그렇잖아도 부피 없는 몸집은 최대한 웅숭그려졌고 갓 시집온 새색시마냥 목소리는 안으로만  기어들어갔다.

수줍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

안 받을 수는 없고, 받고 나서는 어떻게 응대해야 하는 거람?


"아... 네... 그러세요?"

저 세 마디 말고는 신규자가 달리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어 보였다.

일단 받기는 받았는데 이제 뭐라고 해야 하나?

"다짜고짜 도대체 뭐가 감사하다는 거냐? 내가 아직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그게 지금 무슨 무성의한 말이냐?"

라고 민원인이 따진다면 나도 뭐라고 대꾸할 말도 없었거니와, 나 또한 공직 생활 내내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전화 응대법이었으므로 뒤에 이어질 말이 두려웠다.

"어쩌고 저쩌고, 이래서 저래서, 그리고 그러니까..."


상대방은 분명 한국어로 나와 통화를 하고 있었으나 마치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낯선 외국어를 들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곳의 풍경은 한쪽에서는 일방적으로 말하기만 하고, 한쪽에서는 무슨 소린지도 모르면서 냅다 받아 적고 보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나마도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전화받았다가 끊고 나면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몰라 낭패를 본 적이 많아 어느 순간부터 무조건 받아쓰기를 했던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무원이 돼서 시골 면사무소에 발령받아 갔는데 다짜고짜 앞, 뒤 맥락도 없이 본론부터 얘기하시는 그런 민원인들의 전화는 나를 절망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며칠 걸리지도 않았다.

단 이틀이면 충분했다.

그나마 기쁜 소식은 중간중간 민원인들이 발화하는 다정한 사투리만은 귀에 찰떡같이 붙어 듣자마자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는 있었다는 사실이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8급이 되고 7급이 되는 동안 사투리만으로도 그들의 요점을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진화하기에 이르렀다.

대단한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죄송합니다. 제가 이제 막 발령받은 신규자라서요. 정확히 몰라서 지금 바로 답변드리기는 어렵고 확인을 하고 다시 전화드리면 안 될까요?"

당시에는 그렇게 양해를 구하는 게 최선이었다.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지만 신규자는 모르니까 모른다고 솔직히 말해야만 했다. 모르면서 아는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게다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서는 더더욱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내 입장에서만이다.


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민원인이 존재한다.

"신규자고 뭐고 공무원이 돼서 그런 것도 모르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냐? 일부터 배워서 출근해야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컴퓨터만 두드리고 있으며 뭐 하냐? 하여튼, 우리나라 공무원들 하여튼!"

여기서 갑자기 왜 '우리나라 공무원들'까지 언급을 하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아니, 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씩이나 범하시는 건가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됐다.

또한 그런 경우 보통은 '1+1'이다.  

'하여튼 공무원은' '가만히 책상에 앉아 키보드 자판이나 두드리고 있다'는 것, 민원인이 맺어준 공무원이라는 신분과  그 직업군의 행태, 두 가지는 천생연분으로 언제나 그 말을 잊지 않는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이젠 헤어질 때도 됐는데  안타깝게도 여전히 함께 한다.(일부 민원인의 생각에서는 말이다.)

그것은, 그러니까 일종의 엄포, 내지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한 근거 없는 반감(을 가진 이들이 의외로 많았다.) 혹은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며느리가 미우면 뭐도 미워 보인다 하지 않던가.

난 그에게 어떤 미움받을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업무를 당장 신속, 정확하게 처리하지 못한 죄는 분명히 있다. 그게 나를 미워하는 이유라면 달게 받아야지.) 그렇게 나오니 당황스러울 뿐이다.


"아, 그러시구나. 혹시 다른 직원은 없어요? 다른 분하고라도 통화하고 싶은데. 그럼 다음에 확인하고 연락 주세요."

세상에는,

놀랍게도,

이제 갓 출근한 신규자에게 태평양 같은 자비의 마음으로 이해심이란 어떤 것인지 몸소 실천해 주시는 민원인도 있다.


어차피 사무분장표상 내 업무라면 내가 책임을 지고 안내를 하고 전달도 해야 할 사항이지마는 베테랑 두 분의 주사님과 든든한 계장님이 계시니 최소한 이제 출근한 나보다는 훨씬 능숙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나도 배워야 일을 하지, 아무리 빈손으로 시작한다고 해도 옆에서 보고 들은 풍월도 없이 뭔가를 해내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쪽 일에는 세상 깜깜한 신규자였으니까 말이다.


근무 중에 많이 보았다.

물론 두 부류의 민원인들을 말이다.

차이가 극명하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일쑤다.

첫 번째 부류는 괜히(어디까지나 내 느낌상) 나를 못마땅해하기도 했고(정말 느닷없이 다짜고짜 위협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면 어리둥절하다.) 두 번째 부류는 대개가 목소리부터 인자하다.

"우리 딸도 공무원인데..."

이러시면서 안쓰럽게 보는 이들도 종종 있다.

그런 분들은 (마침 자매도 없는데 그분의 딸과 의자매라도 맺고 싶을 만큼, 내 아들이 있다면(없는 아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 며느리라도 삼고 싶을 만큼) 말투부터가 다정하고 시종일관 느긋하게 기다려주시고 나의 민첩하지 못한 대응에도 '처음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라며 감격적인 말씀도 해주시곤 했다.

인욕보살이 강림하신 것이란 말인가.


한 번씩 말도 안 되는 억지에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해 달라며 큰소리부터 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선배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동시에 그들의 어떤 과거를 떠올렸다.

그분들도 저런 험난한 과정을 다 거치고 지금 그 자리에 있는 거겠지?

8급 주사님도, 6급 계장님도, 그리고 면장님도 다들 그렇게 이런저런 많은 일들을 겪으며 다 지나오셨겠지?

남들에게도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던 신규자 시절이 있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란 의지가 불끈 솟아나기도 했다.

물론, 의지와 업무수행능력이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았다는 슬픈 현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 저렇게 부딪치고 배우면서 일하는 거지.

세상에 거저 되는 일은 없고 내 노력도 없이 얻어지는 마법 같은 일은 일어나기 힘든 법이니까.

아침에 출근하려면 머리부터 무거워졌다가 막상 면사무소에 들어서면 그럭저럭 살아졌고, 퇴근 무렵이면 가끔 뿌듯함마저 느꼈다.


그 신규자는 참으로 변덕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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