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Jan 29. 2023

면장님 차 당번이요? 제가요?

 걱정만 한가득이었던 어느 신규자 이야기

23. 1. 28. 윗분은 저렇게나 높이 멀리 있어요.

< 사진 임자 = 글임자 >


"임자야, 면장님 차 갖다 드려라. 앞으로는 네가 아침마다 차 갖다 드려."

출근한 지 정말 며칠 되지도 않았었다.

처음 며칠은 건성으로 봤지만 매일 아침 한 주사님께서 면장님이 출근하시면 차를 드리는 모습을 봤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당번이 바로 내가 되었다.


함께 근무했던 직원 누군가는 공시생 시절 마셔 버릇하던 믹스 커피를 여태 못 끊고 매일 마시게 된다고도 했지만 나는 그 공시생 시절에도 커피는 입에도 안 대던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차를 마셨던 것도 아니다.

거의 타 보지도 않고 마셔 보지도 않았으니 맛도 잘 모르고 차나 커피를 잘 타지도 못했다.

당시 내가 꽉 붙들어야 할 것은 금수저도 아니고, 흙수저는 더더욱 아니었으며 단지 '차수저'였을 뿐이다.


"제가 아침마다 이렇게 차나 타려고 공무원 된 줄 아세요?"

라며 발끈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 주사님이 내게 그 일을 하게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신규자라고 무조건 '차 타는 일을 시킨 것'이라고 오해하기 쉽지만 결코 그런 의도가 아니셨다는 것을 안 이상 기분 상해할 일도 전혀 아니었다.


'뭐라고? 아침마다 차를 타라고? 그것도 면장님께?'

차라리 아침이 안 왔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여러 번 밝혔지만 나는 사교성이 아주 뛰어난 편은 못된다.

재잘재잘 주거니 받거니 자연스레 허물없이 이야기 나누기도 처음에는 쉽지 않은 사람이다.(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겠지만, 첫 만남부터 마치 '모태 지인'처럼 굉장한 친화력을 발휘하는 사람도 많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갑자기, 머리가 무거워졌다.

'타라고 하시니까 하긴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드리면서 말은 또 뭐라고 해야 하느냐고? 말을 하면서 드려야 하나? 아무 말도 안 하고 달랑 차만 드리기도 좀 뭣한데? 왜 하필 내가 당첨된 거야?'

이제 겨우 며칠 출근한 신규자는 아직 면장님 얼굴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데 말이다.


다른 직원들은 그나마 이야기라도 좀 하고 밥도 같이 먹기도 하고 오며 가며 한 번씩 얼굴을 볼 일이 있었지만 내겐 어렵기만 한 면장님이시다.

아침에 출근하시면 다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하고 퇴근 때 또 자동적으로 일어나 인사드리는 풍경이 아직 익숙해지지도 않았을 때였는데 하물며 아침마다 '강제 모닝 루틴'이라니!


20명에서 30명 사이의 직원들 얼굴도 '이 사람이 이 사람이다'라고 확신할 수 없는 마당에

(출근한 지 1주일도 안되었다는 점을 감안해 주시기 바람.) 길거리에서 만나도 면장님이신 줄도 몰라보고 스쳐 지나갈 정도로 아직 머리에 입력이 안되었는데, 이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출, 퇴근 시에 잠깐 인사드리는 것도 남들이 일어서서 하니까 무작정 따라 한 거지 얼굴을 일일이 마주치는 자비 같은 것은 베풀어주지 않으셨으므로 면장님은 면장님대로 자리로 가시고 나는 늘 뒷모습만 뵐 수 있었다.(내 자리는 당시 입구 바로 벽 쪽에 있어서 그 자리를 면장님이 지나치시는 것은 찰나였으므로.)

다른 직원들은 이미 근무를 해 오신 분들이니 상관없지만 나는 그런 기회가 아니면 얼굴을 뵐 수조차 없는데 말이다. 게다가 출근 후에는 항상 바쁘셨고 더러는 2층 면장실에 계시기도 했으므로 얼굴이 가물가물하기만 했다.


 면장님의 자리는 사무실 1층 총무계와 복지계 사이의 중간에 있었다. 고 기억한다.

'저 자리가 면장님 자리니까 저기 계신 분이 면장님이시려니.'

그러고 다녔지, 만약 다른 읍, 면에서 오셔서 그 자리에 잠시 앉아 계셨더라도, 민원인이 실수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더라도 나는 그분이 틀림없는 우리 면장님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직 면장님의 얼굴로는 그분을 온전히 알아본다는 것은 내게 무리였다.

자고로 면장님은 얼굴 뵙기가 힘든 분이셨으니까.

그 지자체의 모든 읍, 면장님들을 모시고 그중에서 면장님을 찾아보라고 신규자에게 막대하고도 엄청난 시련을 주신다면 , 솔직히 나는 자신 없다.

복도에 나가 조직도의 사진을 봐도 딱히 일치된다고 느껴지지도 않았을뿐더러 (물론 나도 그렇게 말할 입장은 못되지만) 그 괴리감이란 게 여간 큰 게 아니어서(어디까지나 처음 본 내게만) 실물과 사진 사이에서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물론 그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인상을 주었을 수도 있다.


고기도 잡솨 본 신규자가 더 잘 굽고, 차를 타는 일도 티스푼 좀 휘저어 본 신규자가 더 잘 타는 법, 이라는 엉뚱한 가설은 내가 세우고 나만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 차 한 잔 타는 일, 그게 뭐라고, 뭐 그리 대단하며 어려운 일이라고 그 시절에는 그렇게 머리 싸매고 끙끙댔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습고도 너무 예민했던 것도 같다. 계장님들과 면장님을 제외한 직원들부터 차례차례 차 대접을 해 보고 그다음 심화반으로 계장님들께, 마지막으로 면장님 순으로 이어졌어야 좋았을 것이다.

이제 갓 입학한 초등생이 1학년을 얼마 다니지도 않고 2학년으로 월반해 버린 그런 느낌이랄까.

지금 같았으면

"면장님, 취향을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최대한 반영해 보겠습니다만 맛은 보장 못합니다, 절대."

이렇게라도 살짝 말씀드릴 수도 있었으련만...(이것도 장담은 못하겠다.)

나는 공무원 시험에 최종 합격하고 부모님 농사일을 돕는 대신 선행학습으로 커피 물을 좀 끓여 봤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면장님의 취향을 전혀 알 리 없었던 나는 '그냥' 차를 탔다.

심지어

"면장님, 어떤 차로 드릴까요?"

라고 여쭙지도 못하고 면장님이 차를 고를 선택권마저 박탈해버리고 말았다.

준비된 여러 종류의 차 중에서 내키는 대로 골랐다.

'그런데 티백은 더 우러나오게 놔둬야 되는 거야? 아님 빼고 드려야 하는 거야?'

걱정 못해서 죽은 구신이 붙은 게 틀림없다. 


아침 차 문안 인사는 두어 번 정도밖에 못하고 그 생을 마감했다.

어쩌면 나는 진작에 직감했는지도 몰랐다. 3일 천하의 갑신정변이 이리도 허무할까.

"뭐 하러 자꾸 가져와? 가져오지 마. 내가 알아서 타서 마실 테니까."

급기야 면장님이 단칼에 거절하신 것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 공무원 합격했다는 말만큼이나 아름다운 그 말.


그렇게 내 솜씨가 형편없었나?

누가 보면 일부러 하기 싫어서 대충 했다고도 오해할지 모르겠다마는 나는 전혀 그런 의도는 없었다.

비단 차의 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권위주의적이지 않으셨던 면장님의 성품이 어느 정도 작용했을 테고, 서른 살씩이나 먹고 이제야 공직생활을 시작하는 신규자는 모든 면이 새롭고 어렵기만 했을 테고 그게 너무 티가 났을 것이다.

너무 철이 들고 직장생활을 한 경우의 폐단이 드러났다.

모든 면에서 지나치게 조심성을 보이며 어렵게만 대했다는 것이다.

이젠 그분도 정년퇴직을 하셨을 것이고 그 시절 며칠 간의 일은 기억에 남아있지도 않으실 테지만, 지은 죄 많은 누구에게는 10년이 훌쩍 넘어도 생생하기만 하다.


바래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아쉬움이 남는 것들도 물론 지만 그보다는 기쁨을 느꼈던  순간의 조각들이 훨씬 더 많았던 그 신규자는 이렇게 또 그날의 기억 한 조각을 찾았다.

이전 06화 하마터면 슬리퍼 신고 결재받으러 갈 뻔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