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Jan 16. 2023

공무원 첫 출근 복장,그때 왜 그랬을까?

언제나 정신은 한참 후에 차려지는 법

23. 1. 12.

< 사진 임자 = 글임자>


"그래도 처음엔 옷도 단정한 걸로 갖춰 입어야 돼. 대충 아무거나 입고 다니면 안 돼."

"그럼 정장을 입어야 되는 거야?"

"꼭 정장이라기보다 아무튼 단정한 걸로."

"그러니까 단정한 거 어떤 걸 입어야 하냐고?"

"공무원은 옷도 너무 막 입으면 안 돼."

"아니, 공무원이 뭐라고?"

"사람들이 안 보는 것 같아도 다 보고 있어. 어떻게 입고 다니는지 그것도 직원들이 다 신경 쓴다니까. 그리고 넌 신규자니까 특히."

"신규자인 죄구만?"

"그러니까 대충 입지도 말고 당분간은 신경써."

"그래. 알았어."


나의 20대를 같이 보낸 그 친구는 나의 과거를 모조리 다 알고 있었다.

무엇을 염려하는 것일까?

나보다 먼저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친구가 나의 합격을 축하하며 천기누설을 비밀리에 전달하듯 건넨 조언이었다.


벌써 10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이라 지금은 복장에 대해 많이 너그러워졌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다.

친구 말로는 '공무원은 단정한 옷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평소 복장이 불량한 편은 아니었으나 수험생으로 살아오면서 변변한 직장인 다운 옷 한 벌이 없었다.

내가 자꾸 공무원 시험에 떨어지는 동안 큰 오빠가 결혼을 했고 덕분에 옷 한 벌을 해 입긴 했었다.

그러나 그 결혼식은 한겨울에 치른 행사였고 나는 9월 초가을에 발령을 받았으니 아무리 그 옷이 봐줄 만한 단정한 옷이라 하더라도 겨울옷을 입고 에어컨이 켜져 있는 면사무소로 출근할 수는 없었다.


5월에 필기시험을 보고 몇 주 후 필기합격자 발표가 났었고 곧 면접을 치렀으며 6월에서 7월 사이엔가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나서 마음의 안정을 취할 사이도 없이 모든 걸 팽개치고(아득했던 수험생 생활에서 벗어나면 나는 실컷 놀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잠시나마 일탈의 길로 들어설 여유도 없이 9월 1일 자로 발령이 나버린 것이다.

내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무언가 준비하기엔 촉박한 시간이었다.

9월은, 그러니까 옷을 차려입기 좀 어중간한 달이었다, 고 나는 기억한다.

특히나 격식을 차리고 입어야 하는 자리라면 더욱 그러했다.

여전히 무더위가 이어지는 날이 많았고 출근복으로 입을 마땅한 옷이 없어서 첫 출근 날짜를 통보받은 나는 부랴부랴 쇼핑에 열을 올렸다.

물론 그것은 내가 가장 자신 있어하는 일이기도 하다.

가난한 수험생에게 돈이 없지 옷이 없나.

세상은 넓고 예쁜 옷은 많았다.


그러나, 예쁜 옷 말고 '얌전하고 단정하며 근무에 지장도 주지 않으면서 신규자 다운(무엇보다도 품위 유지의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러나 나는 당시 품위 같은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신규자였다.) 그런 옷을 골라야 했다.

"면사무소 사람들 보면 그렇게 격식 차리고 정장 안 입고 다니던데 도대체 어떤 옷을 사야 할지 모르겠어. 네 옷이라도 몇 벌 보내 줄래?"

라고 그 친구에게 구원 요청은 하지 못했다 물론.


신규자는 모든 게 어렵기만 하다.

옷 하나사 입는 것도, 금붙이 하나 걸치는 그것도 공무원 신분이라는 그 굴레가 은근히 사람을 구속하는 것이다.

물론 공직세계에도 유달리 자유로운 영혼들이 있기는 하다.

"우리 조카가 합격했는데 옷 한 벌 사 줘야지. 정장 한 벌 사서 출근할 때 입고 가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적지 않은 금액의 합격 축하 금일봉을 건네는 분이 계셨다.

나에게 처음 공무원을 권하셨고, 시험에 자꾸 떨어져 의기소침해 있을 때 면사무소 임시직 자리에 응시해 보라고 제안하신 현직 공무원이셨던, 종종 등장하시는 친척 분의 선물이었다.


위아래 검은색 재킷과 치마 정장 한 벌을 사고 추가로 옷을 더 샀다.

후줄근한 공시생이 매장에서 심혈을 기울여 고른 정장을 입고 보니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고 나만 생각했다.

'내가 안 꾸며서 그렇지, 남들처럼 사람다운 생활을 하면 그래도 선량한 미풍양속을 해칠 정도의 외모는 아니야.'

옷은 날개고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었으며 우중충한 과거를 씻고 새 출발 할 수 있는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요사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어둡기만 한 검은색 정장은 사놓기만 했지 그 재킷은 한 번도 걸쳐 본 적도 없고, 심지어 '상가에 갈 때라도 입을 날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어서 여전히 새 옷인 채로 옷장에 얌전히 걸려 있다고(그 친척분 모르게) 이제 와서 조용히 고백한다.

발령 첫날 나는 평소에 내가 점찍어 두었던 원래 내 스타일의 옷을 사서 그대로 입고 출근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쩜 그런 옷을 다 사 입었나 싶다.

상상은 하지 말기를 부탁한다.

오랜 수험 생활로 몸과 마음이 한껏 피폐해진 서른 살의 사리분별 능력이 현저히 떨어져서 빚은 참사려니.

그 옷은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한지 오래다.


결국 나는 모셔두기 위해 정장을 장만한 셈이 되어 버렸다.

"처음 몇 달은 그래도 좀 갖춰 입고 출근해야 될 거야."

그 친구가 그렇게 강조했지만 며칠 출근해 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그 친구는 국가직이고 나는 지방직이다.

최일선 행정을 한다는 면사무소에서 그 거추장스러운 정장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음을 일찍이 깨달은 것이 한몫했다.

일을 하기 위해 출근한 것이지 불편한 정장 입고 신규자 티나 팍팍 내려고 출근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해가 거듭될수록 점차 공무원에게 가장 유용하고 편안하며 실용적인 옷은 만능복인 '산불복'임을 지금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전 04화 약한 자여, 그대 신분은 신규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