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같이, 과감하게, 감쪽같이
평생 같이 할 필요는 없잖아.
23. 3. 14. 꽃도 한 때<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이거 왜 버려? 내가 얼마나 힘들게 만든 건데."
"어? 뭐? 그게 왜 거기 들어가 있지?"
"내 건데 왜 말도 않고 버려?"
"실수로 들어갔나 보다. 미안해."
아이코, 제대로 걸렸구나.
"합격아, 너 이제 안 쓰는 물건이나 필요 없는 것들은 좀 버리자."
"어떻게 버려? 엄마는 어쩌면 그럴 수 있어?"
"우리 집 공간은 한정돼 있잖아.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을 수는 없어."
"그래도 내가 다 만든 것들인데..."
"어차피 평생 다 가지고 있을 수 없잖아. 그걸 알아야 돼."
나는 자꾸만 버리고 싶었고, 딸은 모든 걸 간직하고 싶었던 게 비극을 초래했다.
어릴 때, 어린이 집에서 올망졸망한 것들은 만들어 왔을 때나 기특하고 평생 가보로 남길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반응했지 이젠 서로 그럴 나이들은 지났다.
아이들은 자꾸만 학교에서 무언가를 가져오고 나는 어느 순간 더 이상은 그 물건들이 반갑지 않았다.
물론 열렬한 수업 활동으로 빚은 결과물이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아는' 그것들의 뒷모습을 아름답게 봐줄 필요도 있지 않은가.
장인정신으로 빚어낸 어떤 것들을, 철마다 어떤 날마다 아이들은 고스란히 집으로 가져온다.
무조건 반기지 않는다는 게 아니다.
봐줄 만큼 봐주었고, 충분히 칭찬을 하고 일정기간 전시를 했으면 그만 놓아주는 법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어릴 때부터 오만가지 것들을 다 만들어내는 남매 덕분에 집은 만물상 같았다, 고 나만 예민하게 생각했다.
손재주가 좋아 특히 딸은 어떤 재료를 쥐어 줘도 제법 그럴싸하게 완성품을 내미는 것이 신통방통하기만 했다.
물론 다 옛날 일이다.
아들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
한창 종이 접기에 빠졌던 유치원 시절에 만든 작품은 언젠가(통일의 날보다 더 요원해 보이기는 하지만) 전시회를 열어주겠노라 실언을 한 엄마 때문에 버리지도 못하고 수 백개가 쌓여있다. 야금야금 티가 안 날 정도로만, 특히 비슷한 형상의 것들을 우선순위에 놓고 남몰래 버리기도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다 가지고 살 수는 없는 일인데 이를 어쩐다지?
딸에게는 실수로 쓰레기봉투에 잘못 들어갔나 보다 했지마는 그것은 엄연히 철저하고도 치밀한 계획하에 버려진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 눈에 띄기 전에 봉투를 치웠어야 했는데 방심하다가 그 범행의 현장을 들키고 말았다.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호락호락 넘어갈 딸도 아니거니와 옆에서 한 술 더 떠 과민반응하는 아들 덕에 나는 졸지에 인정사정도 없는 엄마가 되어 버렸다.
"엄마, 진짜 너무해. 왜 우리 것들을 다 버려?"
"말은 똑바로 하자. 솔직히 다는 아니지."
"왜 말도 안 하고 버리는 거야?"
말하면? 곱게 넘어가 줬을까, 너희가?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감쪽같이 내다 버릴 수 있을까?
가끔 부작용이 있기는 하다.
버린 지 몇 년도 더 된 것을 느닷없이 찾는 바람에 적당히 둘러 대느라 진땀 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옛날에 진작에 다 버렸다고 솔직히 다 말하자니 그 비난을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러면 새로 다시 사달라는 아이에게는 어차피 금방 버리게 될 거 굳이 또 살 필요가 있는지 그 비합리성에 대해 얘기한다는 것은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다.
솔직히 이번에는 범행 현장이 발각돼서 그렇지 그동안 알게 모르게 버린 것들이 많은데도 아이들은 그것들이 없어진 줄도 모르는 눈치다.
왜 아니겠는가.
아이들의 관심사는 늘 변하기 마련이고 오랜 기억은 잊히기 마련이거늘.
"그러게. 너희 엄마는 진짜 왜 그런대? 애들한테 물어보고 버리든지 해야지. 그냥 버리면 안 되지!"
불쑥 그 양반이 또 출현해 주신다.
"지금은 낄 때가 아니야. 진짜 내가 버리고 싶은 거는 여태 못 버렸는데. 그것만 버리면 내 속이 다 시원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 양반은 침묵으로 일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