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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r 14. 2023

남편의 OO을 확인했다.

그 빈 속도 끝내 나는 모르겠다.

23. 3. 12. 증거 자료

< 사진 임자 = 글임자 >


"한과가 먹고 싶어. 좀 사 줄래?"

"지금?"

"응. 지금 당장! 반드시 먹어야겠어!"

"또 왜 그래? 임신도 안 했으면서."

"또 그 소리야? 임신 아니면 먹고 싶어 하지도 못해?"


내가 홍길동도 아니고 비록 임신하지는 않았으나, 그래서도 아니 되는 것이지만 난데없는 한과 생각에 자연스럽게 발화되어 나온 그 말을,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싶다고 말도 못 해야 하나?


"합격아, 아빠가 엄마가 먹고 싶다는 거 과연 사 올까?"

"안 사 올걸?"

"엄마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근데 갑자기 왜?"

"주말동안 엄마아빠를 많이 도와줬잖아. 이틀 내내 도와줬으니까 잘하면 사 올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 그럼 한 번 아빠한테 말해 봐 엄마."

그리하여 남편을 시험에 들게 한 것이다.


"한과 말고 타래과 사 올래? 아니면 산자."

"타래과는 뭐고 산자는 다 뭐야?"

"어휴~ 그것도 몰라? 내가 전에도 여러 번 알려 줬잖아."

"근데 이 근처에는 없을 것 같은데?"

"없기는 왜 없어? 가보지도 않고 무조건 없다고 하기야? 일단 나가 봐. 오늘 그거 안 먹으면 잠을 못 잘 것 같아. 당장 사다 줘!"

"너희 엄마 왜 저래? 한밤중에 무슨 한과 타령이다냐?"

솔직히 기대는 안 했다.

내가 이틀 내내 일을 도왔으니 양심이 있다면? 생각했다가, 어차피 내 말 듣지도 않을 거

'일단 말이나 해 보자.'

하고 그냥 아무 말 대잔치 한 번 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잔치의 결과는 놀라웠다.

주섬주섬 옷을 꿰어 입는 것이 아닌가.

시늉만 해도 그쯤에서 멈추려고 했다.

일요일 밤 9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기절할 시간에 벌떡 일어나 뜬금없는 내 주문에 반응해 준 것이 신통방통할 따름이었다.

'어? 이럴 사람이 아닌데? 그래도 양심은 있네.'

그동안 어디 두었는지 꼭꼭 숨겨왔던 남편의 양심을 나는 드디어 찾은 듯했다.

"한과야, 꼭 한과로 사 와야 돼. 엉뚱한 거 사지 마. 한과가 뭔지는 알지?"

내가 쐐기를 박았다.

그러면서도 왠지 엄습하는 불안감, 못 미더운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빠, 나는 약과 먹고 싶은데."

딸이 한 마디 거들어 남편의 막중한 임무는 1+1이 되었다.


"하여튼 이상한 사람이야. 갑자기 한과를 다 사 오라고 하고. 사다 주면 얼마 먹지도 않을 거면서."

드디어 남편이 해냈다.

나와 딸이 주문한 그대로 정확히 임무를 완수했다.

하지만 나는 정작 그것을 보자 먹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으므로 거들떠보지도 않았음은 물론이다.

행동만 보아서는 딱 임신 초기 입덧하는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변덕스러움에 이미 길들여진 지 오래라 크게 놀라워하지도 않았다.

"너희 엄마는 당장 안 사 오면 큰 일 날 것처럼 난리더니 먹지도 않을 거면서 뭐 하러 사 오라고 했나 몰라."


어제서야 한과 맛을 보았다.

속 빈 강정이라더니(요즘 우리 부부 사이와도 많이 닮아 애처롭기까지 한 슬픈 우리의 전통 과자) 부피는 많이 차지하고 몇 개 먹지도 않았는데 반도 채 남지 않았다.

"뭐야? 오늘 이거 자기가 다 먹은 거야? 이렇게 잘 먹을 줄 알았으면 더 많이 사 올 걸 그랬네. 또 심부름시킬지 모르니까 내가 많이 주문해 놔야겠다."

"됐어. 이제 질렸어. 안 먹고 싶어. 절대 사지 마.(=자고로 한밤중에 심부름시키는 재미로 하는 건데 미리 주문해 놓으면 반칙이지.)"

앞으로 또 어떤 무지막지한 하청을 주시려고 그러시나.


이로써 나는 어떤 것을 확인한 셈이다.

속 빈 애정인가, 아니면 주말 근로의 대가인가, 그도 아니면 최소한의 양심인가.

사랑의 힘만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을(차라리 미운 정에 더 가깝겠지만) 그런 것들을 요구했어야 했나?

지금 이 계절과 이 순간에 결코 구해 올 수 없는 복숭아라든지, 빨간 앵두 이런 것 말이다.

물론 임신한 것도 아니지마는...

그래서도 결코 안되지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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