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아빠 전화 안받았지

딸이 아빠 전화를 받지 않았던 까닭

by 글임자
23. 3. 30. 덫은 이렇게 민들레와 시금치가 섞인 것처럼

<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자꾸 여기서 전화가 와."

"어디서 전화가 온다고 그래?"

"봐봐. 모르는 번호인데 벌써 몇 번이나 왔었어."

"그래?"

"도대체 누구지?"

"아, 아빠다."

나도 불과 몇 시간 전에 그 번호로 걸려 오는 전화를 '실수로', 받았다.

그래서 남편이 그 번호로 내게 전화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의 그 쓸데없는 재빠름에 뒤늦게 한탄했음은 물론이다.)

정체불명의 그 전화를 딸은 끝까지 받지 않았고 '부재중 전화'가 5 통도 넘게 뜬 화면을 나는 목격했다.


나는 남편의 전화번호를 저장할 때 액면 그대로 '남편 이름'을 저장했다.

OOO 이렇게 세 글자로 말이다.

남들은 남편, OO 아빠, OO 씨, 기타 등등의 애칭으로도 저장한다지마는 차마 애칭까지는 무리고, 그렇다고 해서 남편 이름을 남편 이름 그대로 저장을 해야지 꿈에나 그리던 나의 이상형의 다른 외간 남자 이름으로 저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한 때 어떤 몹쓸 호르몬의 과다분비로 인하여 철없을 때는 해괴망측한 다른 명칭으로 저장돼 있었던 기간도(아예 저장조차 안되었던 적도 물론이거니와) 분명히 있긴 있었다.

물론 기원전 5,000년 경의 일이기는 하지만.

내가 한 것이 아니라 그 요사스러운 '호르몬'이 한 짓임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만 할 것이다.


어느 날, 쪽파를 다듬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지루했던 터라 이것저것 강의를 틀어놓고 노동요 삼아 들으며 무료함을 달래면서 단순노동을 세 시간 넘게 하던 중이었다.

맹세코, 남편이 자신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왔다면 아마 받지 않았을 것이다.

유치하지만 상대방이 걸어오는 전화 안 받기.

그것도 냉전이라면 우리는 냉전 중이었다. 당시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여느 부부가 종종 그런 일을 심심찮게 겪듯이 말이다.

그러니까 '엉겁결에', 딱 그 상황이었다.

단지 엉겁결에 받았을 뿐이다.

"나야."

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차 싶었다.

이건 뭔가 잘못됐구나.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그날따라 유독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내가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왔는지 나한테 없네."

일주일 내내 출장을 다녀오고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토요일에도 사무실에 출근을 했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핸드폰이 없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나 집 아니야."

남편은 딸에게 전화해서 물어보겠다며 급히 끊었다.

분하다, 내가 먼저 끊을 수도 있었는데.

딱 1초만 더 빨랐더라면...


마트에서 특가 세일로 1+1 상품을 쟁취하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목표물을 향해 달려갔으나 한 발 빠른 알뜰살뜰한 다른 이에게 밀려 그것을 내 손에 넣지 못한다 한들 이리도 원통하랴, 철없던 어린 시절 맛난 반찬의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선보인 그것의 마지막을 오빠들이나 남동생에게 빼앗긴들 이보다 원통하랴.

그날따라 통화를 끝낼 때 민첩성이라곤 1도 없었던 내가 실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유치하지만 누가 먼저 전화를 냉큼 끊어 버리는가가 (물론 나에게만) 중요했다 당시에는.

덕분에 남편의 사무실 번호를 얼핏 알게 됐다.

음, 저 번호로 시작되는 것이 사무실 번호인가 보군.

앞으로 경계해야 할 번호가 될 것이다.


"얘들아, 모르는 번호는 절대 받지 마! 알았지?"

"왜?"

"요즘은 사기꾼들이 아무한테나 전화해서 사기치고 그러거든. 조심해야 돼."

"사기꾼이 어떻게 우리 번호를 알아?"

"사기꾼이니까 알지!"

"난 내 친구들 몇 명한테만 내 번호 알려 줬는데?"

"그게 말이야. 사기꾼은 아무한테나 마구 전화를 걸어. 그래서 전화를 받으면 일이 나는 거야."

"전화만 받는 게 뭐가 어때서?"

"얘기하자면 복잡한데, 너희 보이스 피싱이라는 말 들어 봤지?"

"응."

"아무튼 모르는 번호는 받지 마 가능하면. 알았지?"


딸과 아들을 앉혀 놓고 보이스 피싱의 폐해와 점점 진화해 가는 사기꾼들의 교묘한 술수와 감히 상상도 못 할 만큼의 금전적인 피해와 안타깝게도 거기에 걸려든 수많은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뉴스 사례를 들어가며 한참 동안 설명했다.

게다가 실제로 내 지인이, 가깝게는 당장 친정 가족과, 친척의 생생한 경험담을 늘어놓으며 경각심을 갖도록 했다.

"그러니까, 너희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가 아니면 일단 받지 마. 너희가 급히 전화받을 일은 없잖아 솔직히? 못 받더라도 큰일 날 만큼은 아니잖아. 그치?"

"그건 그렇지."

딸은 재빠르게 수긍했다.

"아무튼 요즘 무서운 세상이야. 정말 나쁜 사람들이 있다니까. 항상 조심해야 돼. 알았지?"

"걱정 마 엄마. 나 못 믿어?"

딸은 자신을 못 믿으면 누구를 믿느냐며 결코 모르는 번호 따위는 받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가끔, 내 전화도, 외할머니의 전화도 종종 받지 않을 때가 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거지?

단순히 놓쳐서겠지?

아무렴, 다른 의도는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근데 엄마, 아까 그 번호로 아빠가 전화한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아?"

"엄마한테도 전화 왔었어."

"그거 아빠 번호 아니잖아?"

"응. 아빠 사무실 번호야."

"그래?"

"봐봐. 여기 엄마 핸드폰에도 그 번호가 찍혀 있잖아."

"정말 그렇네? 근데 왜 아빠 핸드폰으로 안 하고 저 번호로 한 거야?"

"핸드폰을 안 가져갔나 봐. 그래서 집에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전화한 거야."

"아, 그랬구나."

"엄마, 근데 나 잘했지?"

"어?"

"엄마가 모르는 번호 절대 받지 말랬잖아."

"맞아, 그랬지."

"그래서 내가 끝까지 안 받았어."

"우리 딸이 정말 엄마 말을 잘 들었네."

"나 잘했지?"

"그럼 그럼, 우리 딸, 정말 장~하다!!!"


좀 지나친 거 아닌가 싶어도, 험한 세상이니, 흉흉한 세월이니 엄마도 할 수 있는 만큼은 단속 좀 해야겠다 얘야...

어차피 더 크면 엄마 말을 그대로 다 따르지도 않을 테고 네가 판단할 수 있는 날도 곧 오리니.

딸아, 너는 인생을 지금처럼만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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