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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y 08. 2023

우리 집 핵인싸(?)

친절할 수록 불안해지는 아이러니

2023. 5. 3.

< 사진 임자 = 글임자 >


"아빠는 한 명인데 왜 이렇게 사방에서 불러?"

"사방에서 안 불렀어. 난 볼일 없어 이제."

"아, 그래?"


토요일 아침, 며칠 동안 비가 내려서 그런지 손목이 다시 시큰거렸다.

그래서 남편에게 당근 좀 잘게 다져달라고 부탁을 했고, 남편은 그 일을 해냈고, 내 볼일은 이제 다 끝난 직후였다.


"얘들아, 아빠 좀 그만 불러. 엄마도 부르고 너희도 자꾸 부르면 아빤 어떡해?"

가뭄에 콩 나듯 우리 집 세 멤버가 한꺼번에 그를 찾을 때가 있다. 물론 순간이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법이니까.

"당근 다 다졌으면 내 볼일은 다 끝났어. 난 더 이상 볼일 없어. 그리고 애들도 더 이상 아빠 안 찾는데 무슨 말이야? 어디서 누가 사방에서 찾는다고 그러셔?"

"아까 합격이가 불렀잖아?"

"지금은 아니야."

"우리 아들도 부른 것 같았는데?"

"아까 한 번만 불렀어."

"아, 그랬어?"

"응, 그랬어. 그러니까 이제 가도 돼. 난 이제 요리해야 돼. 좁으니까 좀 비켜 줄래?"

토사구팽까지는 아니었지만 난 남편이 당근만 다져주면 그만이었으므로, 아들은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면 그만이었으므로, 딸은 블루마블을 아빠와 할 수 있는지만 알면 그만이었으므로, 남편이 염려했던 것만큼 그렇게 분주히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몸이 하나라 어디에 몸 둘 바를 몰라하던 그의 몸을 둘로 가르자는 솔로몬의 의견 같은 것을 내는 이 또한 어디에도 없었는데, 그 사람 혼자 과민반응을 했다, 고 나만 생각했다.


"오늘 아침에 아빠가 당근을 잘 다져줘서 동그랑땡이 잘 만들어졌네. 아빠가 같이 해준 거라 더 맛있지 얘들아?"

"응, 아빠가 최고야!"

"아빠만?"

"아니, 엄마도 최고야!"

기어코 딸에게 아빠를 비롯해 엄마도 최고란 찬사를 들은 나는 비로소 흡족해졌다.


그나저나 요즘 남편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네.

무슨 부탁만 했다 하면 다(는 아니지만 다라고 느껴질 만큼 친절하시다.) 들어준다.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다.

그날도 그렇다.

"그냥 넣지 마. 당근 안 넣어도 맛있어. 그냥 대충 먹어."

평소 같으면 당근을 다져달라는 부탁에 저런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요리 미니멀리스트, 어떻게든 무위주의자로 살고픈 이, 뭔가 요구를 하면 단칼에 거절하던 이였다.

그런데 그날 아침에는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에 벌떡 일어나 당근을 무려 한 개 반씩이나 다졌다.

대목을 맞은 나는 집에 있는 당근을 모두 그 앞에 내밀었다.


사람이 일관성 없이 왜 그러실까?

아무래도, 다음날 시가에 갈 예정이라서 그러는 건가?

그동안 축적된 나만의 스몰 데이터에 따르면 시가에 갈 날이 다가올수록 평소보다는 좀 더 너그러워지고 내 부탁도 잘 들어주는 느낌(어디까지나 느낌)이었다.

이런 걸 고급 전문용어로 '시가 방문 찬스'라고 한다지 아마?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

그래도 그 정도면 아이들하고도 사이가 원만한 편이고 게임을 할 때 보면 정말 재미있게 잘 놀아줄 때도 있으니까(나는 왜 아이들과 하는 게임이 재미가 없을까. 게임만 빼고 다 재미있는 것 같다.) 무난하다 싶으면서도 종종 엉뚱한 말과, 내 상식에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발언을 일삼아서 그렇지 대체로 괜찮다, 생각이 들다가도 한 번씩 또 왜 저리실까, 그런 생각도 들면서 종잡을 수가 없다.

방심하다가 뒤통수 얻어맞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지.

하지만 나도 모자란 점 투성이니까 감히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할 입장은 못된다마는...


그가 친절하면 할수록 형체도 뚜렷하지 않은 곧 닥칠(것만 같은) 불미스러운 일에  또 불안감이 엄습하곤 한다.

머지않아 다시 그 주기가 돌아오고야 말리라는 막연한 그 불안감, 온전히 내 것이다.

이런 내 마음을 그가 안다면

"호강에 겨워서 별소릴 다 하네."

이러겠지?

그래, 차라리 정말 단지 호강에 겨워 하는 소리였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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