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똑같아 어차피. 뭐 하러 그런 걸 사? 햇반이 다 거기서 거기지. 광고만 요란하고 비싸기만 하지"
"아니야. 이건 달라. 쌀부터 좋은 거랬어."
"하여튼 쓸데없는 건 사가지고."
"이왕이면 좋은 걸로 잡수라고 사다 주니까 그게 지금 말이야 막걸리야?"
"좋은 거 안 사줘도 돼! 난 그냥 12개짜리 흰쌀밥 한 박스로 된 거 그게 제일 좋아. 무슨 차이나 있을 줄 알아? 별거 없다니까 그러네."
"진짜! 별거 있다니까 그러네.(=별거 있다고 믿고 싶다.= 별거 있어야 한다.= 별거 없어서는 안 된다.=진짜 별거 없다면 내가 불리하다.)"
이런 걸 고급 전문용어로 '지지리 해 주고도 좋은 소리 못 듣는다'라고 한다지 아마?
이렇게 자꾸 나에게 목욕값을 줄 테야?
5년 만엔가 햇반을 다 사 봤다.
그 양반은 비상용으로 사놓자고 하는 편이지만 나는 반대다.
집에 쌀이 있고 전기가 들어오는데 굳이?
그 양반을 '남의 편'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문제의 그것은 3개가 들어있었고 검정 쌀밥이었고, 무엇보다 쌀과 물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넣지 않았다는 그 말이 나를 혹하게 했다.
물론 결코 저렴하다고는 볼 수 없는 가격이었다.
원래 가격은 거의 만 원에 가까웠으나, 마침 반값 세일 중이었다.
반값 세일의 유혹을 나는 뿌리칠 수 없었다. 그건 그 행사를 진행하는 회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나는 동방 예의지국의 주부다.
고로 구매한다.
그 올가미에 걸려들고야 만 것이다.
나 같은 사람도 있어야 경제가 돌아간다.
그래, 그 양반이 직장 생활한다고 고생하는데 햇반이라도 좋은 걸로 줘야지, 나는 단지 그 마음뿐이었다.
출장이 잦아지니 비상용으로 챙기고 다니다가 요긴하게 쓰일 날이 있으려니 해서 말이다.
물론 아무리 그 양반이 우리 가족을 위해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보고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원래의 제 가격을 온전히 다 지불하고 그에게 먹일 그 정도까지는 솔직히 아니었으므로 이번 기회를 한껏 이용한다.
반값이라는 말이 없었다면 우리 집에 발도 못 들여놨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평소엔 밥을 그때그때 해서 먹는 편이라 내가 손수 햇반을 살 일은 거의 없다.
그 양반 부탁으로 멀고 먼 옛날에 기원전 5,000년 경에 '햇반 구입 체험활동'을 한두 번 해 본 적은 있다 물론.
"또 세일해서 샀구먼? 제 가격 주고는 절대 살 사람이 아니지, 자기가."
'또'라는 그 부사가 심히 내 기분을 상하게 했으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세일해도 절대 싼 건 아니야!."
뜨끔했으나, 나는 '반값 세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햇반치고는 저렴한 가격이 아님을 거듭 강조했다.
귀신같이, 용하게도 그 양반은 이제 나를 너무 잘 안다.
"뭐 하러 그 돈 주고 굳이 이걸 사 와? 그냥 흰쌀밥 사면 되지."
"그래도 흑미가 좋잖아. 블랙푸드 몰라?"
"그게 뭐 별거라고. 아무것도 없다니까."
"생각해서 좋은(물론 내가 생각하기에만) 밥 사 오니까 한다는 소리가 겨우 그거야?"
"아니, 굳이 뭐 하러 별것도 아닌 걸 비싸게 주고 샀냐 이거지."
"그게 무슨 말이야? 난 이 세 개에 5만 원이었다고 하더라도 자기 건강을 위해서라면 몇 상자라도 사서 쟁여놨을 거야. 하나에 만 원씩이라도 자긴 그 정도 한 끼의 흑미 햇반을 먹을 자격이 충분히 있어. 자기가 이렇게나 고생하면서 우리 가족을 위해 힘들 게 일하는데 이까짓 반값 세일해서 산 게 뭐가 그리 비싸다고 그러는 거야? 난 자기를 위해서라면 더 비싼 햇반이라도 얼마든지 살 수도 있어!"
라고는, 입술에 침 바짝 마르는 소리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았다 물론.
그 양반 또한
"세상에 만상에! 이렇게나 나를 끔찍이도 생각해 주다니. 보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기분인걸? 당신 덕분에 내가 이렇게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거지. 역시 당신밖에 없어!"
라고는 결코 말하지도 않았다.사실혼 관계에서 ,그것도 결혼한 지 10년도 넘은 부부가 저런 발언을 했다가는 '무기징역'에 처해진다는 사실을 그 양반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 양반은 법이 없이는 못 살 사람이므로.
"내가 말했잖아. 보통 다른 햇반은 쌀 하고 물이랑 또 다른 걸 넣는단 말이야. 근데 이건 다른 첨가물이 없잖아. 그래서 아무래도 몸에 더 좋을 것 같아서 산 거라니까!"
"그 첨가물이 그렇게 문제였으면 진작에 뉴스에 나왔지. 넣으면 안 되는 걸 넣어서 문제가 생겼으면 진작 난리 났을걸?"
아니, 이 양반이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햇반이고 갓 지은 쌀밥이고 뭐고 간에 당장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매운 연기에 눈물 흘려가며 가마솥에 밥을 안쳐 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그 밥 다 돼서 누룽지가 한 대접 나와도 박박 다 긁어모아 나 혼자만 먹을 거다.
그 햇반을 내가 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생각해서 좀 더 좋을 것 같아서 산 거라니까 자꾸 '매를 번다'.
이미 적립한 양도 감당 못할 지경인데 언제까지 무한정 '매' 포인트만 쌓을 텐가?
난 가만히 생각했다.
앞으로 출시될 햇반에는 달랑 쌀과 물만 넣는 것도 좋지만 남의 편을 정신 차리게 할 어떤 성분도 약간 첨가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 밥을 먹는 남의 편들이 아내들에게 엉뚱한 소리나 안 하도록 하는 효능이 확실히 입증된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