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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y 23. 2023

'내가 왜 결혼했을까?'... 그리고 5월의 가정법

5월, 그날이 오면

2023. 5. 21.

< 사진 임자 = 글임자 >


"벌써 그날이 됐네. 엄만 잊고 있다가도 그때가 생각나."

딸이 물었다.

"언제 말이야?"

"어쩌면 아빠랑 처음 만났을지도 모를 때 말이야."

"그때가 언젠데?"

"2009년 5월 23일."


며칠 전에 집에 가는 길에 '또' 그 배너를 보았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걸리는 배너가 있다.

그 옛날 아무 상관도 없는 남편과 한 공간에 있었으면서도 서로 몰라봤던 그때를 생각나게 하는 그것 말이다.


"그날 아주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기도 했거든. 그래서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 엄마가 시험 끝나고 버스 타고 집에 가는데 뉴스에 나오더라."

"무슨 일이 있었는데?"

지방직 공무원 필기시험을 마치고 집에 가는 버스 안에서 들었던 뉴스는 너무나 뜻밖이라 내가 그날 시험을 보고 온 사실까지도 거짓말 같은 착각마저 들었었다.


남편의 얼굴을 처음 본 것은, 그러니까 둘이 직접 만난 것은 2009년 여름 무렵이었다.

"그럼 그날 우리 한 교실에서 같이 시험 봤겠다. 그 지역 응시자들은 아마 한 교실에서 다 시험 봤을걸?"

"그랬어? 별 걸 다 기억하네. 난 그날 출입구 맨 앞쪽에서 시험 본 것 밖에는 생각 안 나."

"그러고 보면 우린 그날 같은 공간에 있었네."

"그랬겠네."

"신기하다."

"솔직히 말해 봐. 그때 날 보고 반해서 나중에 카페에서 쪽지 보내고 나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지?"

"무슨 소리야?"

"다 계획적이었지? 그때 나 봤어, 안 봤어?"

"보긴 뭘 봤다고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끈질기게 접근했을 리가 없어. 하여튼 눈은 높아가지고."

"얘들아, 엄마 뭐라고 하는 거야, 지금?"

"아휴, 너희 아빤 눈이 엄~청 높은데 엄만 그때 눈이 없었나 봐."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엄만 외모를 하나도 안 보는 사람이거든. 근데 아빤 외모를 엄청 따지는 것 같아."

"너희 엄마 또 시작한다."

이맘때가 되면 종종 나누던 우리 집만의 몹쓸 대화다.


"엄마, 엄만 왜 아빠랑 결혼했어?"

하루는 딸이 물었다.

"글쎄다..."

"좋아하니까 결혼한 거 아니야?"

"글쎄..."

"아빠, 아빤 왜 엄마랑 결혼했어?"

"좋아하니까 결혼했지."

"엄마도 아빠 좋아해서 결혼한 거 아니야?"

딸은 기어코 내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듯 포기하지 않고 물었다.

"정말 왜 엄마가 아빠랑 결혼했을까?"

"좋아하니까 결혼하는 거지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결혼하겠어?"

딸은 엄마도 '아빠를 좋아한 나머지 '결혼했을 거라고 굳게 믿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를 어쩐다?

선뜻 대답이 안 나오니.

그래, 그랬겠지.

싫은 사람과는 절대 결혼할 수 없는 법이니까.


살면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남편을 만난 건 어쩌면 '운명'이었을까?

그건 우연이었을까?

우린 인연일까?

악연일까?

천생연분일까?

나는 운명을 믿는 것도, 안 믿는 것도 아니다.

운명이었다면, 왜 굳이 운명의 상대가 이 사람이어야 했을까?

나는 내 고향이니까 그렇다 치고,

왜 하필 그 사람은 내가 지원한 지역에 시험을 응시한 걸까, 본인 고향을 놔두고?

내가 그 해에 다른 지역에 지원했더라면, 아니 그전 해에 합격했더라면?

만약에 그 지역에서 일행직을 한 명이 아니라 2명 뽑았더라면?

그것도 아니다.

내가 처음 남편이 내게 보내온 쪽지에 답장하지 않았더라면?

그래, 답장 정도는 할 수도 있지, 하지만 만나자는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 버렸더라면?

그래. 한 번 정도는 만날 수도 있지, 하지만 계속 만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싫다고 했더라면?

아니, 아니야. 사귀는 것까지는 할 수 있어, 하지만 결혼하자고 했을 때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이제 와서 아무 의미 없을 '가정법'들이 머릿속에서 난무하는 가운데 올해도 그날이 돌아오고야 말았다.

지금 내게 이렇게나 예쁘고 착한 딸과 아들이 있는데  이미,저 남편이 있는데 쓸데없는 가정법이 다 무슨 소용이랴.

오늘을 잘 살아내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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