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방 정리를 했습니다. 옷장 깊숙한 곳에서, 까맣게 먼지가 쌓인 상자를 발견했죠. 습기가 차 눅눅해진 골판지와, 이리저리 일그러진 테이프 뗀 자국. 한때는 이 상자가 내 세상의 전부였지만, 이제는 열어보는 것조차 망설여집니다. 그 안에는, 잉크가 닳아버린 몇 자루의 펜과, 누렇게 변색된 원고지 뭉치, 그리고 표지마저 해진 낡은 노트 몇 권이 들어있었습니다.
나는 ‘초심을 잃지 말자’는 말을 미덕으로 여기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두렵습니다. 이 기억마저 잊으면, 이야기를 써 내려가던 나의 빛나던 시간이, 정말로 없었던 일이 될 것만 같아서.
하지만 펼쳐든 낡은 노트 속의 문장들은,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습니다. 한때는 그 서툰 문장 하나하나가 나의 재능 없음을 펼쳐 내보이는 것 같아 아팠지만, 이제 나는 그 문장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읽어낼 수 있었고, 꾹꾹 눌러쓴 필체는 따뜻하게도 바래져 있었습니다.
내가 잊었기 때문이겠죠. 그것도 잘. 꿈을 통째로 지워버리는 게 아니라, 기억과 나 사이에 숨 쉴 수 있는 작은 틈을 만들었기 때문이겠죠.
펜을 놓은 직후의 기억은, 손안에 쥔 날카로운 유리 조각과 같았습니다. 잊지 않으려 꽉 쥘수록, 마음에는 더 깊은 상처가 났죠. 그 꿈을 놓아버리면 내 전부가 사라질 것만 같아, 피 흘리는 손을 차마 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그 자체로 거대한 강물이었습니다. 억지로 놓으려 하지 않아도,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날카로웠던 기억은 조금씩 마모되고, 서로에게 부딪혀 둥글어졌습니다. 오늘 내가 상자 속에서 다시 마주한 것은, 더 이상 나를 찌르지 않는, 상처 없이 쥘 수 있는 부드러운 조약돌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상자를 닫았습니다. 예전처럼 황급히 밀어 넣지도,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나의 일부가 된, 더는 현재가 아닌 액자 하나를 제자리에 놓아두는 기분이었습니다.
이야기를 사랑했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기억을 잊은 것이 아닙니다. 비로소 상처 없이 그것을 어루만지는 법을, 그렇게 나의 일부로 끌어안는 법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