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내 나이 먹어봐라

치매는 진행 중

by 엘 리브로

처음 아버지의 치매를 의심한 사람은 사촌 여동생이었다. 어느 날 오전 전화를 받자마자 동생이 말했다. "언니야, 외삼촌 왜 그러셔? 괜찮아?" "갑자기 뭔 소리?" "아니 외삼촌이 아까 나한테 전화하셨는데, 보험 서류 보내준다고. 주소가 어디냐고 물어보셔서 얘기했더니 언제 순천으로 이사 갔냐 그러시잖아!"

'엥? 이건 뭐지?' "아무래도 치매 같아. 나 10년 넘게 순천에서 살고 외삼촌이 여기 매년 몇 번씩 오셨잖아. "

"그래, 이상하다. 그렇잖아도 요즘 아빠가 이상하시더라. 며칠 전엔 우리 집에서 동광주 IC로 나가는 길을 헤매셨대."


아버지는 베테랑 운전자 셨다. 젊어서부터 중장비학원 강사로 일하시며 운전을 하셨고 자가용이 대중화되기 전부터 회사에서 운전대를 잡으셨다. 드라이브를 좋아하셔서 주말이나 휴가철이면 전국을 누비고 다니셨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도 길 찾는 데는 선수였다. 그런 아버지가 언제부터인가 길을 잃기 시작했다. 엄마와 함께 차를 몰고 꽃구경을 나섰다가도 해마다 다녔던 관광지에서 집으로 가는 길을 찾다가 몇 바퀴 돌고 같은 도로를 벗어나지 못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퇴직 후 한동안 국비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학원에 열심히 다니시더니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을 취득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보험설계사가 되셨다. 수십 년간 몸담아 온 자동차 정비와 관련된 일을 하실 거라는 예측을 벗어나는 의외의 선택이었다. 영업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라는 걸 다들 아는데 아버지 자신만 모르시는 것 같았다. 지인들에게 보험상품을 홍보하지 못해서 자동차 보험만 팔았다. 내가 주변에서 들은 얘기가 있어서 간혹 "아빠, 요즘엔 OO 보험이 인기라는데 그 회사엔 없어요?"라고 물으면, "있지! 한 번 들어볼래?"라고 말하며 노트북을 열어 관련 상품을 조회하시는 것이었다. 많은 인맥들은 그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만 하는 자동차 종합보험의 고객일 뿐이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다양한 상품들을 홍보해 보시라고 하면, "필요하면 물어보겠지, 내가 자꾸 얘기하면 얼마나 부담되겠냐?"라는 답답하고 태평한 대답이 돌아왔다.

어쨌든 아버지는 매일 양복을 깔끔하게 갖추어 입고 보험회사로 출근했으며 고객과의 상담을 위해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덤으로 경치 좋은 곳을 드라이브할 수 있는 그 일에 만족하시는 것 같았다. 나도 지인들에게 아버지가 보험설계사라고, 자동차보험을 넣어달라고 부탁하면서 머뭇거리고 긴장하면서 영업은 절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역시 그 아버지의 그 딸이다.


"OO 엄마! OO 할아버지 정말 왜 그러시는 거야? 바빠 죽겠는데 정말 미치겠네!" 전화를 받자마자 대뜸 소리를 질러대는 사람은 같은 아파트에서 앞집에 살다가 이사 간 이웃 언니였다. "왜? 무슨 일이야?" "우리 집 배달 트럭만 주로 타니까 승용차를 잘 안 타서 보험상품을 변경하기로 했거든. 자기 아버지, 엊그제 오셔서 주행기록 사진 찍는다고 하시더니 아무리 기다려도 안 오셨어. 바쁜 일이 갑자기 생겼나 보다 했지. 어제 전화했더니 미안하다고 오늘 오신다는 거야. 약속 시간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도 안 오셔. 나 지금 은행도 가야 하고 제품 주문서 작성해야 하고 바쁜데 전화도 안 받으신다고!" "언니, 미안해. 급한 일부터 먼저 봐. 아버지는 내가 연락해 볼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사고가 난 걸까? 걱정이 됐다. 수차례 전화를 걸어도 연결이 되지 않았다. 엄마에게 물어보니 평소대로 출근을 하셨다고 했다.

한참만에 통화 연결이 됐다. "아빠, 지금 어디세요?" "왜? 고객 만나러 가고 있지" "고객 누구? 고 OO 씨?" "아니, 넌 모르는 사람인데 아까 사고 났다고 연락받아서 그쪽으로 가는 중이다." " 많이 다쳤어요? 아빠가 왜 그리 가요? 전담 부서가 따로 있잖아요!" "사람이 다친 건 아닌데, 그래도 지인인데 가서 봐야지, 어떻게 모른 채 한다냐."

머리 뚜껑이 확 열리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고 OO 씨랑 만나기로 했다면서요? 지금 일도 못하고 기다리고 있다는데, 엊그제도 바람 맞히셨다던데 또 그러면 어떡하냐고요?!" "어? 고 OO? 아... 내가 깜박했다... 이따 오후에 간다고 해라, 지금 사고 난 데 먼저 가고..." "안 돼요! 지금 바로 이쪽으로 오세요. 사람이 다쳐서 병원에 누워있어서 문병 가는 것도 아니고, 무슨 접촉사고 현장에 설계사가 출동을 하냐고요! 저희 집으로 오세요, 또 잊어버리고 다른 데로 가시면 안 되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또 잊어버리겠냐, 이따 오후에..." "아뇨, 지금 오세요. 오늘밖에 시간이 없대요."

30분쯤 지나자 아버지가 오셨다. 고객의 차가 남평에서 사고가 났다고 했다. 지금 뭐가 중요하냐는 나와 사람 사이의 인정에 대해 얘기하는 아버지 사이의 반복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서로 이야기의 포인트가 달랐다. 난 아버지의 건망증이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고 OO 씨의 우유 대리점 앞에 차를 세우고 전화를 걸었다. "언니, 아버지랑 앞에 와있어."

아버지와 나, 대리점 사장은 안부 인사를 나눴고, 아버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럼, 담에 뵙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를 하더니 차에 다시 올라타려고 했다. "아빠!", "OO 할아버지!" 두 여자가 동시에 소리 지르자 아버지는 운전석으로 반쯤 들어가던 몸을 급히 빼내며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아빠, 주행기록 사진 찍으신다면서요! 서류도 줄 게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버지는 자주 해야 할 일과 하기로 한 일들을 잊어버리셨다. 심지어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신발을 벗기도 전에 되돌아 나갈 뻔하기도 했다. 어느 날 사촌동생이 집에 놀러 와서 있었는데 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왔다."집에 있냐? 근처에 지나가다가 생각나서 들를까 해서." "네, 오세요. 은영이도 와있어요."

아버지는 현관문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오랜만에 보는 조카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구두의 끈을 풀면서 몇 마디 더 주고받았다. 그러더니 다시 양쪽 구두의 끈을 다시 묶는 것이 아닌가! 그러고는 허리를 펴면서 "더 놀다 가거라. 난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야겠다."라고 말하면서 문 손잡이를 잡는 것이었다. "외삼촌! 언니 만나려고 오신 것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호호호..." "그래, 그럼 차 한 잔만 마시고 가야겠다."

그날 함께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얘기를 나누고 나서 아버지는 사무실에 들렀다가 퇴근하겠다며 나가셨다. 사촌 동생과 나는 아버지가 아마 나에게 뭔가 하실 얘기가 있었는데 사촌 동생이 있어서 못하고 그냥 가시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의 말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선 치매에 대한 의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대학병원의 신경과에 예약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본인이 치매일 리가 없다는 아버지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것이다. 예방 차원에서 한 번만 가보자고, 미리 검사해서 나쁠 건 없다고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너도 내 나이 먹어봐라. 사람이 한 번씩 깜빡할 수도 있지, 누굴 노망 난 노인 취급하는 거냐?"라며 화를 내셨다. 예약 날짜를 잡아놓고도 다른 일이 생겼다며 미루거나 다시 예약하기를 거부하셨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아버지의 잊어버림과 엄마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결국엔 어렵사리 검사를 받았는데 인지기능 검사에서는 높은 점수가 나왔다. 아버지의 계산력이나 논리력은 여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MRI 상으로 뇌의 위축이 세 군데서 뚜렷하게 보였다. 신경과 교수는 아버지가 약을 드셔야 한다고 말했다. 치료는 아니지만 진행 속도를 늦출 수는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약을 거부했고, 나는 치매 예방약이라고 연세 드신 분들은 대부분 드시는 거라고 매일 아버지를 설득해야 했다.


아버지는 보험회사에 계속 나가셨고 치매약을 간헐적으로 드셨다. 회사의 업무처리에 차츰 문제가 생기는 것 같았다. 약속을 잊어버리거나 서류를 제출하지 않거나 해서 재가입이 안되거나 보험금을 받지 못한 고객들의 민원이 생기고 탈퇴하는 고객의 수가 늘어갔다. 아버지의 성격은 점점 더 급해지고 화를 자주 냈다. 한 번은 아버지 회사 근처에서 친구들과의 모임이 끝나고, 실비보험 청구한 것이 들어오지 않아 확인하러 들렀다. 예상한 대로 아버지에게 드린 서류가 누락되었고 보상과에 접수할 서류를 책상 위에 쌓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들고 직접 접수하러 가려고 했더니 본인 컴퓨터에서 접수할 수 있다고 자리에 앉으라고 해서 다시 앉았다. 아버지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역력했다. 일어서려는 나를 붙잡으며 자꾸 정신없게 일어선다고 화를 냈다. 처음 들여다보는 화면에 나타난 양식에서 기입해야 하는 칸들을 들여다보고 내가 접수한 서류에 적힌 것들과 비교하며 코드를 찾아서 입력했더니 문제가 풀렸다. 10년 이상 해 온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해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를 꾹 삼켜야 했다.

아버지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어서 답답하고 예전과 다른 아버지의 모습에 슬픔이 밀려왔다.


아버지의 치매는 그렇게 진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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