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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 리브로 Oct 25. 2022

엄마와  이별하기 1

엄마는 미안하다고 하셨다...

2019년 1월의 마지막 금요일 오후

요양보호사의 전화를 받았다. 다급하지는 않은 그러나 염려 가득한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엄마가 이상하세요. 며칠 동안 통 못 드셔서 매일 죽을 드리고 있었는데 오늘은 전혀 삼키시지도 않고 축 쳐져 있으시네요."

나는 요양보호사의 그 말을 듣고도 전혀 걱정을 하지 않았다. '노인들 며칠 설사하시면 당연히 기운 없고 쳐질 수밖에 없지...'라고 가볍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며칠 못 드셨다고 하니 기력이 많이 떨어지셨을 테고 영양제라도 맞으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까지 어떻게 이동할 것인가 머릿속을 재빨리 굴리며 순간 한숨이 나왔다. 나는 그렇게 심뽀가 못된 딸이었다.

알겠다고, 내가 가서 확인하겠다고, 처음에 말했다가  다시 전화를 걸어 요양보호사에게 부탁을 했다.

"샘, 퇴근길에 구급차 불러서 엄마 00 병원 응급실로 이송해 주세요. 제가 병원으로 바로 갈게요."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의 운전대를 잡고서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엄마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았다. 당장 그날 밤 간병을 누가 해야 하나, 간병인을 불러도 하루나 이틀 일하러 오겠다는 사람도 없는데 1주일을 쓰면 그 간병비는 또 어떡하나... 밤에 집에 혼자 계시게 되는 아버지는? 학생들 방학이라 방과후 수업이 오전에 있는데 내가 병원에서 자고 출근을 해야 하나? 등등 이런저런 문제들을 생각하느라 머리가 복잡했다.  




엄마가 응급실로 실려가기 며칠 전, 그동안 참고 참아 온 감정의 소용돌이는 그날 하루 종일 를 휘감은 채 놓아주질 않았고 뭐라고든 말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날 낮에 엄마의 약을 처방받아서 지어다 드렸었고(며칠 동안 구토와 설사를 했다는 말을 듣고) 엄마는 가슴이 답답하다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보고 싶다고 하셨다.

엄마의 손을 잡고 함께 병원에 갈 수 있었다면 백 번이고 모셔다 드렸다. 아니면 아버지라도 엄마를 업고 계단을 내려가실 수 있었다면, 아버지가 건강하셨더라면, 휠체어를 이용해서 어떻게든 해 보려고 했을 것이었다.

침상 아래로 내려올 수 없는 와상환자인 엄마를 엘리베이터도 없는 아파트에서 밖으로 모시고 나가는 방법은 사설 구급차를 부르는 것 밖에 없었다. 오전에 3시간 수업을 하고 나서 고속도로를 40분 동안 운전한 후 번잡한 시내의 병원에서 약을 지어서 부모님께 가느라 나의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다.

"우선 약 드셔 보시고 며칠 지켜보시게요. 그래도 계속 안 좋으면 구급차 불러서 병원에 모셔다 드릴게요."라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마음이 아팠다. 그날따라 유난히 기운 없는 엄마의 병색 짙은 모습을 뒤로하고 나온 자신이 한심했다. 한편으론 동생들이 멀리 있거나 자기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혼자 감당해야 하는 상황들에 화가 났다. 엄마가 아프다는데 휴가를 내서라도 옆을 지켜야 하는 게 자식인 거다. 나에게 모든 걸 맡겨놓고 나 몰라라 하는 동생들에 대한 반감과  '엄마의 사랑도 받지 못한 내가 왜?'라는 옹졸한 마음까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많은 세월 동안 한 번쯤은 엄마에게 묻고 싶었다. 왜 날 그렇게 미워했냐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었냐고... 그러나 말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오래된 원망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고 이제는 늙고 병들어 싸울 기력조차 없는 엄마에게 가혹한 말을 할 수도 없었으니까...

엄마가 류머티즘과 파킨슨병, 골다공증을 순차적으로 앓으면서 20년 동안 입원, 수술, 간병 등이 반복되었고 그 지난한 세월 동안 나는 감정의 소용돌이와 싸워야만 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만 지나면 모든 게 다 해소가 된다는 말이 아니었다. 한 가지 문제만으로도 힘든 상황에서 삶은 늘 또 다른 문젯거리들을 덤으로 안겨주곤 했다. 그럴 땐 모든 것을 다 놔버리고 싶다는 내면의 아우성과 또 싸워야만 했다.

시간이라는 약이 작용하는 동안 내면의 병은 나은 듯하다가도 다시 도지길 반복했다. 극복했다고 여기며 한동안 잘 지내다가도 내가 해결해야 할 일들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시기마다 불쑥 재발을 하곤 했다. 마치 몸속 깊숙한 곳에 잠복되어 있다가 면역기능이 떨어지면 증상을 발현시키는 바이러스처럼 말이다.


나에게 상처만 주었던 엄마, 나에게 단 한 번도 손길을 내밀지 않았던 엄마, 내가 두 아이를 낳아 기르는 동안 단 하루도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지 않았던 엄마였는데 왜 내가 병든 엄마를 돌보아야 하는지 소리쳐 묻고 싶었다. 그것이 나의 내면의 증상이었으나 한 번도 꺼내 보이지 못하고 시간의 약으로 진정시켜가며 살았다.




내가 힘들다는 것을 남편은 알아주지 않았고 내가 친정에 하는 만큼 시부모한테도 하는지를 검열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에게는 출근해야 하는 직장이 있었고 매주 한두 차례 음식과 약을 챙기며 친정을 드나들었기에 그 반만큼이라도 시댁에 가야 했으며 딸들이 수험생의 기간을 거치는 몇 년 동안 딸들의 병치레도 나 혼자서 감당해야 할 문제였다. 남편은 회사일만으로도 힘들다며(물론 힘든 시기이기는 했다) 회사일 이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딸, 며느리, 엄마, 직장인, 가사 전담인 노릇에 지칠 대로 지쳐 있으면서도 어느 것 하나 놓지 않고 이를 악물고 해내고 있었다.

그러나 환자인 엄마를 정신적으로 더 힘들게 하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써왔던 시간들이 무색하게도 그날의 나는 유난히 힘들었다. 나의 감정은 면역능력이 바닥을 치고 있었나 보다.  


결국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뭔가 말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만 같았다.

"엄마... 저 지금 너무나 힘들어요... 엄마랑 저, 사실 좋은 사이는 아니었잖아요...?"

어떻게 말을 이어가야 할지 몰라 띄엄띄엄 말하는 나에게 엄마가 대답했다.

"미안하다... 너한테 정말 할 말이 없다..."

힘없는 엄마의 그 말에 눈앞이 흐려지고 목이 메어왔다. 훌쩍거리는 나와 한숨짓는 엄마. 그게 아닌데... 내가 원했던 것은 그게 아니었다. 예전의 서슬 퍼런 엄마의 모습은 어디로 간 것인지... "내가 도대체 뭘 잘 못 했냐?"라고 따져 물어야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두고 있었던 설움을 내놓고 한탄할 수 있을 터인데 미안하다는 엄마의 말에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며 마음속으로 나를 다독였다.

'됐어. 이만하면 된 거야. 엄마가 미안하다고 하시잖아. 뭘 더 원하니?'


그때는 엄마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엄마와 나의 한숨과 탄식이 오가는 잠깐의 순간 생각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엄마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으니 된 거다. 이것을 시작으로 앞으로 엄마와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시도해 보자... 됐다, 이 정도면 된 거야.'

엄마에게 그날 낮에 했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우선 약 드시고 지켜보시게요. 그래도 계속 안 좋으면 병원에 모셔다 드릴게요. 많이 숨차면 내일이라도 연락하세요, 꼭이요!"

"그래, 그렇게 하자..."

엄마의 사그라져가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전화를 끊으며 내가 참으로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로는 더 이상 얼마나 더 잘할 수 있나 하는 자기 합리화를 하기도 했다.




응급실의 출입문을 열자마자 요양보호사가 나를 향해 다가왔고 나는 그녀의 근무시간이 약간 초과된 것이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했다. "영양제는요?" "아직요, 의사 선생님이 보호자분이랑 얘기할 게 있대요, 어서 가보세요."

요양보호사는 인사를 하며 바로 퇴근을 했고 나는 침대에 누워 한쪽으로 비스듬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힘없이 양팔을 늘어뜨리고 얕은 숨을 내쉬고 있는 엄마에게 다가갔다. "엄마, 괜찮아요? 잠깐만요, 의사 선생님 얘기 듣올게요."라고 말하고는 데스크에 앉아있는 담당 의사에게 갔다.

"00 씨 보호자님이세요? 지금 어머님 상태가 아주 안 좋아요. 응급검사 몇 가지 해봤는데 신부전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고 심근경색이 있어요. 당장 스탠트 넣어서 넓혀줘야 하는  막힌 관상동맥이 3군데 있고..."

그 순간, 가슴이 답답하다며 병원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던 엄마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 왔어야 했구나!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내가 야속했을까...!'

의사는 계속 설명을 했다. 스탠트를 넣는 시술 동안에 돌아가실 수도 있다고, 무사히 시술에 성공하더라도 이미 심근경색이 진행된  상태라 언제든 갑자기 돌아가실 수 있으며, 이번 고비를 넘기더라도 신부전이 심해서 남은 여생은 혈액 투석을 받으셔야 한다는 얘기를...

그리고 마지막엔 기도삽관과 인공호흡기 부착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그것이 현재의 엄마 상태로는 고통만 줄 뿐 의미가 없다고 연명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서명을 하는 게 낫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을 정신도 없이 그 상황이 무섭고 그런 중대한 결정을 상의할 사람이 아무도 옆에 없다는 현실이 야속할 뿐이었다.

스탠트 삽입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어서 결정하라고 재촉받고는 삽입하라고 말했다. 물 한 모금 삼키기도 힘들 만큼 늘어져 있는 엄마에게 어렵게 조영제를 삼키게 하는데 나와 눈을 맞추는 엄마의 초점이 흐려지는 게 보였다.

"잠깐 동생과 통화하고 올게요."라고 간호사에게 말하고는 급하게 복도로 뛰어나가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미 카톡으로 동생들과의 톡방에 응급실에 온 상황을 설명한 상태였으나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는 아직 모를 터였다. 여동생은 톡을 볼 수 없는 시각이었다. 엄마의 상황을 속사포처럼 빠르게 설명하자 동생은 목이 메어 말을 잘 잇지 못하며 당장 내려갈 테니 제발 엄마 돌아가시지 않게 해 달라고, 엄마 살아있는 얼굴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울먹였다. 연명치료가 무엇을 의미하게 될지 너무나도 잘 아는 나였지만 그 순간엔 엄마를 보고 싶다고 말하는 막내 동생에게 살아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그래, 알았어. 서명 안 하고 있을게. 어서 내려와."


전화를 끊고 다시 응급실 안으로 들어서는데 갑자기 의료진들의 긴박한 움직임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인투!" (Intubation, 기도삽관)

관상동맥 확장 시술을 하려고 침상을 옮기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응급상황이 생긴 것이다.

기도삽관을 받으며 고통에 신음하는 엄마의 목소리와 몸부림치는 엄마의 모습에 나는 오열했다. 온몸으로 저항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를 억제하며 기도에 관을 넣는 의료진들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돌아서서 흐느껴 울었다.

그렇게 빨리, 그렇게 갑작스럽게 상태가 나빠지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몇 분 전까지도 나와 눈을 마주쳤던 엄마가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나자 더 이상 내가 할 일은 없었다. 엄마는 두 눈을 감은 채 불러도 대답이 없었고 손으로 벌려 본 눈은 탁한 눈동자가 고정되어 있었다. 중환자실엔 보호자가 있을 수도 없고 하루에 두 번, 정해진 시간에 잠깐 면회만 될 뿐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서 남동생에게 다시 전화했다.

"내려오는데 여섯 시간 이상 걸릴 것이고 자정이 다 될 텐데  엄마는 인공호흡기까지 달고 중환자실에 누워계셔서 얼굴도 볼 수 없으니 내일 일찍 출발하는 게 낫겠다."

퇴근 후 병원으로 바로 달려온 여동생에게도 상황 설명을 해줬고 잠깐 엄마의 누워있는 모습을 보고 병원을 나왔다.

기계에 의지하여 가슴을 들썩이며 숨을 쉬고 있던 엄마를 중환자실에 두고 나온 마음은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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