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의 늘 같은 레퍼토리
평생 이해받고 싶었던 마음
작년 6월에 돌아가신 나의 시어머니.
어머님은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지 두 달쯤 지나서 돌아가셨다. 몇 번의 고비가 있을 때마다 둘째 딸과 며느리인 내가 달려갔고 몇 시간씩 옆에서 지켜보고 귀에 대고 명복을 비는 얘기를 속삭였다. 어머님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시아버님도 우리와 함께 하셨고 '오늘을 넘기기 힘드실 것 같다.'는 병원 측의 연락을 받을 때면 시고모님 내외분과 남편의 사촌들도 번갈아 다녀갔다.
임종 당일엔 남편(나의 시아버님)과 아들, 딸, 며느리, 손주들에 둘러싸여 편히 떠나셨다. 그 정도면 외롭지 않게 가신 것 같았다. 코로나가 이미 병원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기에 임종면회에 대해 엄격했던 몇 달 전과는 다르게 허용적이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살아생전의 어머니는 많이 외로우셨을 것이다. 가족 중 누구도 어머니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아예 대놓고 못 들은 척 딴짓을 하거나 때로는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며 쏘아붙였다. 아버님도 나의 남편도, 두 딸인 형님들마저...
그런 반응에 대해 어머니는 단 한 번도 화를 내는 법도 없이 "내가 언제 또 그랬다고 그런다냐?"라든가 "아니, 한 번만 들어봐라 잉?" 하면서 애걸복걸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며느리인 나는 그들의 반응에 민망해지고 어머님이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서 열심히 들어주고 "어머, 그러셨어요.", "세상에... 왜 그랬대요." 등등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반응을 해드렸다.
그래서인지 어머님은 늘 내게 고맙다고 하셨다. "잘 살아줘서 고맙다.", "니들 걱정 안 해도 되니 참 좋다, 니 덕분이다." 하시며...
그렇다고 어머님이 특별히 며느리를 위해 해주신 것은 없다. 결혼하고 처음 몇 년은 무심한 어머님의 태도와 명절이면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모든 것을 나에게 맡겨버리는 것에 많이 힘들고 서러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것은 며느리인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특이한 어머님의 성격 탓이라는 걸 알게 됐다.
두 아이를 낳고 독박육아에, 집에서 손 하나 까딱 않는 남편과 나 몰라라 하는 친정과 시댁 양쪽 어머니들 덕분에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었던 세월을 보내면서 몇 년 동안 시어머니를 미워하기도 했다. 그러다 둘째 형님이 늦둥이 딸을 낳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시어머니가 자신의 딸에게도 친정 엄마의 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미워하는 마음을 버릴 수 있었다.
'원래 그렇구나. 내가 며느리여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성향이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는 것이었구나...'
나의 깨달음은 시어머니를 대하는 나의 마음을 가볍게 해 주었고 기대감을 버리는 순간 편해짐을 느꼈다.
딸들인 형님들이 어머니에 대해 가졌던 원망의 마음은 너무나 커서, 어린 시절부터 쌓여 온,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했다는 원망을 60 넘은 나이의 형님들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어머님은 그 연세의 대부분의 시골 할머니들과 달리 억척스러운 생활력을 갖고 있지 않았고 그 무엇보다 자신이 중요했다. 논농사로 바쁜 시댁에서도 다른 동서들과 일꾼들이 정신없이 고된 노동에 힘들어할 때도 나의 시어머니는 "아이고 힘들다" 하며 방에 가서 드러누워버렸다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세월이 지나서도 아무렇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본인은 정말 몸이 약해서 보호받고 살아야 하는데 남편을 잘 못 만나서 고생만 했다는 이야기를 평생 입에 달고 사셨다.
며느리가 며느리 노릇을 제대로 하지 않으니 시댁에서 이쁨을 받았을 리 만무하지만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시댁에서 서러웠던 일이나 남편이 무심하고 자신을 아껴줄 줄 몰랐다는 것만 기억하고 되풀이하셨으니 며느리인 나를 제외한 남편과 자식들에게서 늘 핀잔만 들어야 했다.
어머니는 가족 모임으로 식당에 갈 때면 늘 빈 그릇을 준비해 갔고 남은 음식들을 담아 오곤 했는데 그것 때문에 모임의 마지막은 늘 고성이 오갔다. 수많은 음식들 중 거의 손이 가지 않은 깨끗한 접시의 음식이 버려지는 것이 아까워서 담아 오고 싶어 하는 어머니를 다들 창피하게 여겼다. 나는 친정에서는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일이라 생소하면서도 비싼 음식들이 버려지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늘 어머니의 편을 들었다. 때로는 내가 먼저 나서서 "어머니, 빈 그릇 챙기셨어요?" 하고 물어봤고, 어머니는 "아이고, 내 정신 봐라. 아까 꺼내놓고 깜박했다, 고맙다이." 하시며 차 안에서도 식당에서도 내 칭찬을 한참동안 하시곤 했다.
어느새 나도 어머니를 닮게 되었는지 반찬이 많이 나오는 한식 메뉴를 먹는 날이면 빈 그릇을 챙겼고 그릇을 챙기지 못한 날은 위생팩라도 달라고 부탁하게 되었다.
그것이 왜 창피한 일인지 형님들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다. 식당의 입장에서도 손님들이 남긴 음식을 버리는 것이 골치일 것이고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이 버려지는 것 또한 기분 좋은 일은 아닐 텐데...
어머니는 나의 남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해서(어느 어머니가 그러지 않을까마는) 입만 열면 우리 OO, 우리 OO... 애기 때 얼마나 이뻤는 줄 아느냐. 내가 제일 이뻐한 아들이다. 네 명 자식들 중 제일 착실하다. 우리 OO를 알아보고 결혼한 네가 정말 사람 잘 본 거다..." 등등 끝없는 아들 칭찬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철없는 며느리인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나서 표정 관리가 잘 안 됐을 테지만 원래 남의 기분을 잘 의식하지 않는 어머니는 전혀 개의치 않았고 대꾸하지 않는 나의 불편한 심기를 전혀 몰랐다.
몇 년 지나고 어머니를 파악한 나는 능청스럽게 맞받아치며 어머니의 말에 따박따박 따졌으나 그마저도 어머니는 기분 나빠하거나 화를 내신적도 없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이쁘다잖아요. 어머니 눈에만 OO가 제일 이쁜 거였겠죠!", "저도 어렸을 때 할머니가 데리고 나가면 보는 사람마다 이쁘다, 똘똘하다 칭찬이 자자했대요!"
시어머니 앞에서 얼마나 당돌한 말버릇인가! 그런데도 어머니는 "그래도 우리 OO가 더 이뻤을 거야. 얼마나 벙글벙글 웃기만 하던지..." 라며 며느리인 나보다 자신의 아들이 더 잘났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은근히 어머니를 놀리는 재미에 빠져 한마디도 안 지고 말장난을 하는 짖꿎은 며느리를 대화상대로 끝없이 얘기를 이어가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가끔 내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하곤 했는데 내가 전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어머니의 옛날 지인들과 얽힌 수십 년 전의 갈등 상황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수없이 반복해서 얘기할 때였다. 아버님이나 형님들, 남편이 "아이고 그놈의 소리 또 시작이네!" 하면서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는 바로 그 대목이 방언처럼 터져 나오면 난 차마 일어서지 못하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들어줘야 했던 것이다.
참다못해 어느 날 나는 말하고 말았다.
"어머니, 그 얘기 지금까지 백번도 더 하셨거든요. 저 결혼해서부터 지금까지 만날 때마다 하셨다고요! 엊그제 전화 통화할 때도 말씀하셨어요!"
내 딴에는 큰맘 먹고 한 말인데 어머니의 반응은 아주 쿨했다.
"그러냐? 그럼 이번 한 번만 마지막으로 말할게 들어봐라이. 긍께 그 윗집 OO 놈이 글쎄 우리 아부지가 평생 고생해서 모은 돈으로 산 그 땅을..."
"아, 네네... 그니까 그 윗집 OO가..."
"맞다 맞아. 그놈이..."
"아, 맞다면서 뭐 하러 똑같은 얘길 하시냐고요! 다 안다니까요~~"
"아니 내가 하도 억울하니까 그러지. 들어봐라, 그놈이 글쎄..."
어머니의 같은 이야기는 평생 반복되었고 난 속으로 딴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는 다 외우고 있는 그 레퍼토리에 아무런 감흥 없이 맞장구를 쳐주는 내공에 이르렀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그 대화가 그립냐고? 그건 절대 아니다. (대화의 시간은 그립지만 그 레퍼토리는...)
다만 어머니가 같은 얘기를 끝없이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나는 늘 생각했었다. 풀리지 않은 마음의 앙금이 있어서 그러시는 것일 텐데 왜 아무도 들어주고 편들어주지 않는 것일까 하고.
지금의 나처럼 글로 썼더라면 어머니의 마음이 위로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살아계신다면 올해 여든여덟의 연세인 어머니는 글씨를 잘 쓰셨다. 맞춤법이 많이 틀리긴 했지만 한 번 보면 잊히지 않을 강렬하고 커다란 글씨체로 일필휘지 써 내려간 메모가 달력의 페이지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누워서 라디오를 듣거나 TV를 보다가도 누군가의 말이 인상 깊게 느껴지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달력에 문장을 써놓곤 하셨다. 노인정에서 만난 친구분들과의 약속이나 자식들과의 만남, 자식들의 방문 등에 관한 기록도 질서 없이 빼곡한 글자들 속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글씨들을 사진으로라도 남겨둘 걸 하는 아쉬움이 크다. 어머니가 모아둔 잡동사니들을 버리면서 다 사라져 버렸을 흔적들. 혹시 작은 수첩 하나라도 남아있어 어머니의 글씨를 볼 수 있다면 좋겠다.
아버님께 전화를 걸어 여쭤봐야겠다.
며느리가 착하다고 늘 말씀하셨던 어머니, 그 며느리가 어머니한테 사랑 못 받았다고 어머니를 한때 많이 원망한 것도 모르셨던 어머니, 자신밖에 몰랐다고 식구들의 원성이 자자했지만 어찌 보면 아이처럼 순순했던 어머니.
저 세상에서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매번 어머니의 편을 들어주는 친구분들을 많이 만나셨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