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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 리브로 Apr 11. 2023

봄소풍

그 여자 김미선 1

  1981년 봄.

  봄소풍을 하루 앞둔 어느 날이다.

  5학년이 된 지 한 달 만에 전학을 왔고 또 한 달이 지났다. 그동안 친구들과 많이 친해졌고 처음에 많이 낯설었던 학교도 선생님도 이제 편해졌다. 학교가 끝나면 거의 매일 함께  집에 와서 숙제를 하고 골목길에서 옆집에 사는 친구들과도  어울려 고무줄놀이와 공깃돌 놀이를 하던 연화가 오늘은 그냥 자기 집으로 간다고 했다.

  "엄마랑 소풍준비 하기로 했어. 가방에 꽉 차게 겁나 많이 살 거야!"

  "안녕! 내일 보자. 맛있는 거 많이 사 와!"

  연화와 교문 앞에서 헤어지고 집으로 걸어오는 내내 희진은 김 빠진 기분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내일 소풍 간다는 사실에도 전혀 신이 나지 않았다. 아침에 밥 먹으면서 신나게 떠드는 희진에게 할머니가 하신 얘기 때문이다.

  "오늘은 학교 끝나고 친구들이랑 놀지 말고 바로 집으로 오니라. 소풍 갈 때 먹을거리 사준다고 이리 온다더라..."

  "누가? 누가 오는데?"

  "전에 말한 그... 담양댁 말이여."

  "왜? 난 싫은데... 만나기 싫다고!"

  "니 애비가 말해 놨다고, 꼭 와서 사주고 싶다고 어제 전화 왔어야."

  아침밥 먹는 내내 그 여자를 만날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 같았다. 학교에서도 수업을 듣다가 골똘히 그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도대체 담양댁이라는 그 여자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처음 보는 사람이랑 소풍준비를 하라니 말도 안 돼...'


  아빠는 한 번도 희진이 듣는데서 '그 여자'에 대해 이야기한 일이 없었다. 어른들끼리만 아는 얘기인 것 같아 희진도 물어보지 않았다. 할머니가 고모들과 전화로 하는 얘기를 엿들으니 '그 여자'는 지금 아빠와 함께 살고 있으며 집이 담양이라고 했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 여자를 '담양댁'이라고 불렀다.

  아무도 직접 대놓고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친정 식구들이 사는 대전으로 가버린 것과 분명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진은  엄마가 가버린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었는데 누군가 그 사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장이 꼬이는 것처럼 심사가 뒤틀렸다. 거의 매일 저녁마다 집에 들러 숙제를 물어보고 학교생활을 물어보고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다가 일어서는 아빠를, 이제는 자고 가라고, 더 있다 가라고,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희진은 '그 여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몰랐다. 전화를 받고 나가면서도, 철길 건널목 바로 지나 OO상회 앞에 서있다는 말만 듣고,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하는 생각과 '뭐라고 인사를 해야 하지?'라는 고민을 하며 철길 쪽으로 걸어갔다.

  눈부신 5월의 햇볕과 오후의 나른함, 하늘거리는 블라우스와 몸에 꼭 붙는 스커트를 입고 경사진 대로를 걸어 올라오며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훔치던 여자의 실루엣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선명하게 기억났다.

  손을 흔들며 이름을 부르는 여자와의 거리가 좁혀질수록 희진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어색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잘 지냈어? 많이 컸네! 더 예뻐졌구나, 호호호..."

  "......"

  말없이 시선을 내리고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희진의 한 손을 꼭 잡더니 끌어당기며 그 여자는 말을 이었다.

  "나 기억 안 나? 작년에 아빠랑 저녁에 만나서 밥도 먹었었는데..."

  "......"

  "생각나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사실 '그 여자'를 다시 볼 일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고 '담양댁'이 '그 여자'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지만 놀라지도 않았다.  

  희진은 자기가 정말 많이 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높은 뾰족구두를 신은 그 여자와 키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짙은 화장에 커다란 가슴과 엉덩이가 드러나는 꼭 붙는 옷차림의 그 여자와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도 창피하고 지나가는 누군가가  알아볼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날 여자는 희진에게 이 넓은 모자를 사주었다. 하얀 망사 레이스로 된 리본을 두른,  파스텔 빛깔의 알록달록한 체크무늬가 있는 모자였다. 소풍 갈 때면 언제나 그래왔듯이 과자며 빵이며 음료수를 이것저것 한가득 사서 들고 오면서도 하나도 즐겁지가 않았다. 시장통에서 오가는 사람들 속에 소풍준비를 위해 나온 같은 반 친구라도 있을까 봐 신경이 쓰여서 얼른 대충 사고 집에 가고만 싶었다. 

  여자는 골목 입구에서 손을 흔들며 말했다.

  "소풍 잘 다녀오고  다음에 또 만나자!"

  커다란 종이봉투를 양팔로 끌어안고서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하고  뒤돌아선 희진에게는, 활짝 웃는 여자의 눈빛이 너무나  슬퍼 보였다.


  다음날 친구들은 모자가 예쁘다고 한 마디씩 했다. 1년 전에 그 여자가 사준 연보라색 블라우스에 멜빵 치마를 입고 간 소풍날의 단체 사진을 함께 보며 며칠 후 연화가 말했다.

  "우리 오빠가 이 사진 보고 그러는데 우리 반에서 네가 제일 예쁘대."

  사진 속에서 희진은 챙 넓은 모자 아래 윤기 나는 단발머리를 하고서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김미선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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