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따끔거리고 잔기침을 하는 희진을 할머니가 소아과에 데리고 갔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감기에 걸려 병원에 다니곤 했던 희진은 이사와 전학 이후로는 처음 병원에 간 것이다.
집 근처 어디에 병원이 있는지 몰랐던 할머니는 버스를 타고 전에 다녔던 학동에 있는 '이소아과'에 희진을 데리고 갔는데 대기실에 환자가 많지는 않아서 오래 기다리지 않아 진찰을 받고 주사를 맞았다. 조제되어 나오는 약을 기다리고 있는데 새로 들어오는 남자아이와 보호자인 아주머니를 보고 할머니가 큰 소리로 불렀다.
"아이고, OO어무니 아니요?"
"오메! 희진 할무니! 이사가셨담서요?"
할머니와 아주머니는 서로의 근황을 물으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눴고 희진과 남자아이는 서로 얼굴을 본 적은 있지만 잘 알고 있는 사이는 아니어서 반갑지도 그렇다고 할 얘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희진보다 두 살쯤 어린 그 아이는 수두에 걸렸다고 했다. 아이가 진료실에 들어갔다 나온 뒤에도 할머니와 아주머니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둘은 한창 이야기 중인 어른들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앉았는데, 남자아이는 두 다리를 앞뒤로 흔들거나 의자의 등받이를 손끝으로 문지르거나 하더니 나중엔 이리저리 의자를 옮겨 다니며 앉았다가 누웠다가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희진의 옆자리로 오더니 "누나는 몇 학년이야?"라고 말을 걸어왔다.
"5학년."
"어느 학교 다녀?"
"00 국민학교."
"어디에 있는데?"
"동명동."
"우리 형도 5학년인데..."
"그래? 몇 반이야?"
"5학년 3반."
"어? 나 전학 가기 전에 3반이었는데? 네 형 이름이 뭐냐?"
희진은 같은 반이었던 남학생의 남동생이라는 걸 알고는 남자애가 좀 더 친근하게 여겨졌다. 새 학년이 되고 나서 한 달 만에 전학을 가버려서 그 형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처음의 서먹함이 사라지자 새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마침내 어른들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인사를 나누며 헤어졌다. 희진과 남자아이도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며칠 동안 감기약을 먹고 나자 기침과 콧물이 멎었고 목이 아픈 것도 사라졌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희진은 갑자기 옆구리가 가려워 긁다가 웃옷을 올리고 맨살을 들여다보고는 깜짝 놀랐다. 엄지손톱만 한 커다란 물집이 옆구리에 볼록 솟아있었고 그보다 작은 물집이 몇 개 더 주변에 나있었다.
학교에서도 옆구리와 배가 가려워 자꾸만 옷 위에서 몸을 긁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 배와 등에 불긋불긋한 반점들이 수없이 퍼져있고 어떤 것들은 물이 차있어서 긁다가 터지기도 했다. 할머니가 약국에서 연고를 사다 발라주셨지만 가려움은 더 심해졌고 다음날 아침엔 목과 얼굴, 팔다리까지 발진이 다 올라와 있었다.
흉측한 얼굴과 심한 가려움 때문에 희진은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오메, 수두에 옮았는갑다, 쯧쯧... 그때 병원에서 00 엄마 만났을 때 말이여..."
희진은 학교에 가지 않고 할머니와 함께 '이소아과'에 갔다.
의사 선생님은 다른 학생들에게 전염시킬 수 있다며 일주일 동안 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니 처음엔 너무 신이 났지만 수두의 발진 때문에 온몸이 가려웠고 긁은 자리에 진물이 나고 딱지가 앉기도 했다.
알약을 잘 못 삼키는 희진은 많은 약을 먹는 일이 너무 힘들었고, 바르는 물약은 할머니가 바르는 파운데이션과 같은 색이어서 약을 바른 얼굴은 하얀 진흙탕에 빠졌다가 나온 몰골이었다. 온몸에 덕지덕지 바른 물약이 마르면서 피부가 잡아당겨지는 것 같은 느낌도 너무 싫었다.
날짜가 지나면서 크고 작은 발진들은 머릿속에도 귓구멍 안쪽에도 생겨났고 온몸 구석구석 안 나는 곳이 없었다.
어떤 것들은 좁쌀 같고 어떤 것들은 물이 가득 들어있고 또 시간이 지난 것들은 딱지가 생겼는데 그 딱지를 떼면 살이 파여 곰보가 된다고 했다.
"긁지 말어야! 얼굴이 곰보딱지 되믄 시집도 못 간다이!"
"아야, 가려워도 참으랑께! 물집 터지믄 그 자리에 또 새로 생겨난다고 안 하디?"
긁지 말라는 할머니에게 희진은 짜증을 내고 울었다. 너무너무 가려워서 힘들었고 곰보가 될까 봐 무서웠다. 얼굴엔 이미 몇 군데 살이 패인 자국이 생겨났다.
"엉엉엉... 난 몰라, 이제 어떡하냐고. 이게 다 할머니 때문이야! 그때 왜 병원에서 아줌마랑 오랫동안 이야기하고 그랬어! 할머니 때문이라고! 엉엉엉..."
아버지는 희진을 달래주었다.
"곰보 안되니까 걱정하지 마라. 지금은 흉터가 생겨도 시간이 지나면 살이 다시 채워진단다. 수두는 '마마병'이랑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