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진은 명치끝이 타들어가듯 아파서 이부자리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다. 옆으로 누워 양쪽 무릎이 가슴에 닿을 정도로 몸을 웅크린 채 울고만 있었다.
할머니가 학교에 전화를 걸어 오늘도 희진이가 많이 아파서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결석한다고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밥 한수저라도 뜨라는 할머니의 말에 희진은 잔뜩 구부렸던 허리를 펴려고 했으나 장이 꼬이고 뜨거운 불로 지져대는 듯한 통증에 식은땀이 흘렀다.
할머니는 할머니 키만큼 훌쩍 커버린 희진을 등에 업고 긴 골목길을 걸어 나가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 학동에 있는 '이 소아과'로 가자고 운전기사에게 말했다.
의사는 목구멍을 들여다보고 청진기를 가슴과 등, 배에 대고 소리를 들어 보았다. 겨드랑이에 체온계를 끼우고 한참을 기다려 열을 재보기도 했다.
병원에 와서 그런 건지 집에 있을 때보다는 명치끝이 덜 아픈 것 같았다.
엉덩이에 주사를 맞고 병원에서 준 우유처럼 희뿌옇고 텁텁한 물약을 한 수저 먹고 나니 훨씬 나았다. 여전히 한 걸음씩 옮길 때마다 쥐어짜는 듯한 느낌이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천천히 걸을만해서 업히지 않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열병"이라고 했다.
희진이 "열병이 뭐야?"라고 묻자 할머니는 "장질부사(장티푸스)랑 같은 것이여."라고 대답해 줬다. 모두 다 처음 듣는 이름들이었다.
며칠 동안 희진은 누워서 빈둥거렸다. 하루에도 수차례씩 먹는 물약은 쓴 약보다 더 지독한 맛이었는데 분필가루를 물에 갠 것처럼 텁텁하고 치약 같은 맛이 났다. 토할 것 같은 메스꺼움을 참아가며 약을 먹었고 입맛이 떨어져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기운이 없고 아무런 재미가 없었다.
너무 심심해서 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언제 갑자기 날카로운 통증이 덮칠지 몰랐고 앉아 있을 기력도 없었다.
낮에는 그런대로 견딜만하던 통증은 새벽녘이면 더 심해졌고, 울면서 잠에서 깨어나면아픔이 누그러질 때까지 웅크리고 누워서 울었다. 배가 아프면서도 고픈데 똑바로 허리를 펴고 앉아서 밥을 먹기가 힘들었고, 입맛이 없어서 반찬 투정을 하며 짜증을 냈다.
할머니는 안 되겠다며 희진에게 당분간 아빠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아빠집에? 싫어! 할머니랑 있을 거야!"
"아따, 내가 하숙생들 밥 할라니 수발 들라 바쁭께, 느그 아빠한테 좀 가 있어야!"
"싫다고! 안 가!"
"거기 가서 병원도 날마다 댕겨야 빨리 낫재. 여기서는 병원도 멀고 나도 힘들구만..."
결국 아빠집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아빠와 담양댁이 함께 살고 있다고 했다.
담양댁이 집으로 와서 할머니와 잠깐 얘기를 나누더니 희진에게 옷가지와 읽을 책 몇 권을 챙기라고 했다.
"어머님, 걱정 마세요. 희진이 잘 돌볼게요..."
희진은 여자에게 손이 붙들린 채로 대문 밖을 나서면서 힘주어 손을 빼버렸다.
여자의 짙은 화장과 향수 냄새가 싫었고 자꾸만 몸을 밀착하며 어깨를 끌어안는 것도 못마땅했다.
그렇다고 떼쓰는 어린애처럼 몸을 밀쳐낼 수도 없어서 뻣뻣하게 양팔을 늘어뜨린 채 땅만 쳐다보며 터벅터벅 걸었다. 골목을 벗어나 큰 길가로 들어서자 명치끝의 통증 때문에 주저앉은 희진은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여자는 어쩔 줄 몰라하며 허둥지둥 희진을 일으켜 세우려는데 뾰족한 구두의 굽 때문에 기우뚱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희진은 이 상황이 너무나 꼴사납고 누가 볼까 봐 창피했다. 울음을 멈추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괜찮니? 걸을 수 있겠어?"
여자의 근심 어린 말투에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부축하며 어깨를 감싸고 걷는 여자가 싫었지만 빨리 동네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택시를 타고 '이소아과'에 들렀다가 다시 택시를 타고 아빠와 여자가 산다는 집으로 향했다.
그 집은 몇 년 전에 희진과 할머니가 잠깐 동안 고모네와 함께 살았던 고모집이다. 몇 달 후에 할머니와 삼촌, 희진의 아빠와 엄마, 여동생까지 여섯 식구가 모여 살게 되면서 그 집에는 고모네 가족들만 살았다. 그 집은 다시 고모가 시골 학교로 발령이 나자 세를 내주었다고 했었다.
빨래를 널 수 있는 옥상이 있는 1층 양옥집의 거실에는 몇 년 전에 보았던 거실장과 소파가 그대로 있었다.
희진의 고모는 시골 학교의 관사에서 살다가 광주에 땅을 사고 집을 지어서 이사를 왔고 한 동안은 집 근처의 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다.
소파 앞에 놓인 탁자와 탁자 옆 벽을 장식한 코스모스 조화 바구니도 그대로였다. 생화보다 더 예쁜 코스모스 조화를 희진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사촌들과 깔깔거리며 온 집안을 뛰어다녔던 기억이 났다. 시끄럽다고 소리 지르던 고모의 화난 목소리, 사촌 오빠와 동생들과 방바닥에 엎드려 퍼즐을 맞추었던 디즈니 동화의 화려한 그림들도 생각났다.
그 집은 그대로인데 방마다 가구는 온 데 간데없고 단출한 살림살이가 놓여 있었다.
작은 방에는 커다란 미싱이 놓여있고 방바닥 가득 이불과 솜, 색색의 천들이 널려 있었다.
여자는 홈패션을 한다며 이불과 커튼 같은 것들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이쁘지? 거실 커튼이랑 안방에 있는 이불들도 다 내가 만든 거야."
희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예쁜지 어떤지는 잘 몰랐다. 반짝이는 색감이 화려하긴 했지만 TV에서 보았던, 침대가 놓인 방의 레이스 달린 이불은 아니었으니까.
여자가 차려준 밥상은 할머니의 밥상과 달랐다. 하숙생들과 함께 먹었던 밥상에 오른 반찬들은 커다란 그릇에 소복이 쌓여 있었고 간장과 설탕, 조미료를 듬뿍 친 할머니의 반찬들은 언제나 맛있었다. 아프고 나서 입맛을 잃기 전까지는...
"먹어봐. 희진이는 뭘 좋아하니? 달걀 좋아하지?"
희진은 식욕도 없었고 싱거운 반찬들을 삼키는 게 힘들어 밥알을 세고 있는 듯했다.
"많이 먹어. 그래야 빨리 낫지. 약 먹으려면 잘 먹어야 돼."
희진은 여자가 밥 숟가락 위에 올려주는 나물이며 콩자반, 달걀말이를 입에 넣으면서 할머니가 보고 싶어 울음이 터졌다.
여자는 당황해서 말했다, "왜? 왜 우는데? 어디 아프니?"
"엉엉엉... 할. 머. 니... 할머니 보고 싶어요... 엉엉엉..."
여자는 자신의 커다란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는 희진의 등을 토닥였다.
먹는 둥 마는 둥 저녁밥을 먹고 나서 약을 먹고는 텔레비전을 켜자 드라마 "전원일기"가 나오고 있었다.
드라마와 뉴스를 보며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아빠가 퇴근해서 집에 왔고 희진은 이 상황이 너무나 어색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어진 집에서 만난 아빠와 그 여자 사이에 이방인처럼 끼어든 기분이 들었다.
아빠에게 예전처럼 조잘대며 말을 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다.
늦은 시각까지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이 들었던 희진은 한밤중에 깨어, 옆에 바짝 붙어있는 여자의 몸에서 슬그머니 몸을 떼며 돌아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