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나는 죽을 것이다. 그때가 언제일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다행이지만 어쨌든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은 죽게 되어 있다.
가족이 세상을 떠날 때 남은 가족은 비탄에 빠지게 되지만 그저 앉아서 울고만 있을 수는 없다. 장례식을 치르기 위한 준비로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사망선고가 내려지자마자 온갖 선택과 결정이 숙제처럼 주어지고 그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고인을 어디에 어떻게 모실까를 정하는 것이다.
문중에서 관리하는 선산이 있거나 가족장을 위한 터가 미리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장례식장에서 갑자기 결정해야 하는 선택지가 그리 많지는 않다.
나의 아버지는 2대 독자인 데다 유복자로 태어났다고 했다. 젊은 나이에 혼자가 되어 3남매를 키워낸 할머니는 시댁 쪽으로는 연락을 거의 끊고 사셨다. 시아버지 쪽으로 작은집이 있었으나 과부가 된 조카며느리를 챙겨주는 사람은 없었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할아버지의 묘는 작은집의 후손들이 관리하는 조상의 묘들과 나란히 있었고 어린 시절에 난 아버지의 손을 잡고 명절마다 성묘를 갔다.이미 꽉 들어찬 그 묘지터에 할머니의 자리는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시에서 운영하는 공원묘지에 모셨다. 그때는 봉분 형태의 묘를 썼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봉분으로 가득 찬 공원묘지는 포화상태가 되었고 새로 자연장이 조성되었다. 무릎 높이의 아담한 철쭉나무 한 그루마다 한 사람의 유골함이 묻히거나 부부가 나란히 묻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오래전에 다 분양이 되었고 지금은 납골당이나 잔디장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작년에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알게 되었다.
공원묘지의 사무실에서 보여준 팸플릿을 보고 선택한 자연장은 철쭉나무 수목장이 아니었다. 묘지의 부지를 넓히기 위해 바로 옆에 있는 산을 다듬어 만든 자연장은 잔디밭에 유골함을 묻고 비석은 세울 수 없으며 겨우 A4용지 크기만 한 표지석이 전부인 묘지였다. 그것도 옆자리에 위치한 다른 묘와의 간격이 손으로 한 뼘 길이밖에 되지 않았고 엎드려 절이라도 하려면 아랫줄에 놓인 다른 고인의 표지석이 발에 밟힐정도로 위아래의 간격도 좁다는 것을 몇 달 후에야 알았다. 아버지의 장례 때는 허허벌판이었던 구간도 곧 빼곡하게 묘가 들어찬 것이다.
그래도 나는 납골당보다는 낫다며, 양지바른 곳에서 하늘과 나무도 보고 바람도 느낄 수 있어서 좋으시겠다며, 아버지와 엄마의 표지석을 내려다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한다.
납골당에는 각 방마다 수백 개의 유골함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나 볼 수 없게 타일로 덮여있다. 수백 개의 타일에는 손바닥만 한 명패가 붙여져 있고 그 명패에 고인의 사진과 이름, 생몰 날짜와 자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추모관(납골당의 다른 이름)에 들어갈 때마다 서늘한 기운과 수백 명의 고인들의 사진이 주는 위압감, 창문도 없어서 바깥세상과 단절된 느낌이 너무 싫었다.
엄마의 유골함은 추모관에 3년 동안 있었고 아버지의 장례 때 꺼내어 잔디장에 아버지와 나란히 모셨다.
작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의 유골함은 그 추모관에 모셔져 있다. 시댁의 조상들을 모신 묘지에 시어머니의 자리도 정해져 있으나 평생 당신의 시댁을 싫어하셨고 친정어머니 곁에 묻히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던 탓에 딸들(나의 두 시누이들) 사이에 의견 다툼이 있었다. 화장장에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결론이 나지 않았기에 내가 나서서 중재를 했다.
우선 추모관에 모시고, 다음에 협의해서 다시 정하시라고... 아버님 돌아가시면 두 분 함께 모셔도 되지 않느냐고, 장소는 그때 정하자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년 만인 지난 4월 25일, 사촌 여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끝까지 희망을 붙들고 인공호흡기와 혈액투석기에 의지하고 있던 제부가 "아무래도 오늘내일 중으로 심정지가 올 것 같아요"라고 말한 날(4월 24일) 저녁, 나는 곧 닥칠 일에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친구에게 전화로 수목장의 위치를 물어봤다.
오래전에 남편과 사별한 그 친구는 사설 추모관에 남편을 모셨다고 했는데, 유골함을 벽에 넣고 유리 덮개를 덮어놔서 공원묘지와 별 차이가 없다고,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봤던 모습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동생이 떠난 날 아침에 나는 장례식장으로 바로 가지 않고, 친구가 최근에 친정어머니를 모셨다는 수목장림을 먼저 방문했다.
수목장림은 시의 공원묘지보다 차로 30분을 더 가야 하는 먼 곳에 있지만, 가는 동안 산과 들의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고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로 넓은 산자락에 근사하게 조성되어 있어 나는 첫눈에 반해버렸다.
"바로 여기다! 너무 멋지지? 네 마음에도 쏙 들지?"
"응, 언니야, 진짜 좋다. 우리 다음에 또 오자.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아. 경치 정~말 좋다!"
동생이 살아생전에 함께 와서 둘러봤다면 활짝 웃으며 꼭 그렇게 대답했을 것 같았다.
전날밤 통화하면서 화장을 하지 않고 나중에 동생 옆에 나란히 묻히고 싶다던 제부는, 시 외곽으로 나가지 않고서는 매장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그마저도 문중에서 관리하는 선산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는 나의 말을 듣고서야 어쩔 수 없이 화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제부와 조카들은 30년 또는 (한 번 더 기한을 연장할 경우) 60년 동안 수목장을 이용하고 그것으로 끝이라는 이용 조건 때문에 망설였고 가능한 최대한 오랫동안 유골함을 그대로 보존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수 백 개의 다른 유골함들과 함께 차가운 타일벽에 갇혀 있는 것을 동생이 원하는 것은 아닐 거라고 나는 얘기했다. 그 서늘하고 삭막한 추모관에 들어갈 때마다 난 답답하고 싫었으니까... 사진 한 장, 꽃 한 송이도 놓을 수 없는 차가운 벽에는 명판에 인쇄된 수많은 얼굴들이 말없는 군중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고인의 인쇄된 얼굴만 보고 서둘러 나와버리곤 했다. 영원한 상실에 대한 슬픔 때문에, 흙에 섞여 나무의 영양분이 되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수목장을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제부와 조카들을 나는 설득했다.
오후가 되자 조문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모두들 분주히 움직이는 가운데 상조회사의 직원이 다른 곳의 수목장을 권하며 팸플릿을 보여줬다. 영원히 그 자리에 유골함을 묻어 두고 볼 수 있을 것처럼 기한 없이 영구히 이용할 수 있다는 말로 홍보를 하니 제부와 조카들의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팸플릿 속 사진은 광역시 내에 새로 조성했다는 수목장의 모습을 꽤 그럴듯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수목장의 가격은 표시되지도 않았고 변동이 되어서라며 나중에 설명을 해주겠다고, 내가 답사를 마치고 온 (산림조합에서 운영하는) 수목림을 잘 알고 있다며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말했다.
보다 못한 내가 결국 다른 사촌 동생(고인이 된 동생의 친언니)을 데리고 그들이 말한 현장에 직접 가서 보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가서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만약에 다음날 보겠다고 미뤘으면 큰일 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조회 소속 사람과 수목장 영업사원이 정신없는 상주들에게 계속 접근해서 계약을 성사시키고 말았을 테니 말이다.
차라리 추모관 벽이 낫지... 논밭 사이로 승용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한 구불구불한 좁은 길을 따라 도착한 수목장은 현재 조성된 총면적이 겨우 600평이었고 비슷한 크기의 2차 예정지는 황토흙이 드러난 벌판으로 나무 한 그루도 없었다. 지금 조성된 묘지도 듬성듬성 나무가 없어서 넓게 자리를 쓸 수 있는 듯 착각할 수 있지만 묏자리를 정하고 나면 나중에 나무를 심어주겠다고 했다. 그 자리가 다 분양되어야 2차 사업계획서를 시에 제출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시기도 정해지지 않았다니... 시에서 허가를 내줄지 알 수도 없는 일이고, 출입로를 넓게 새로 도로를 낼 계획이라면서 그 시기를 물으니 2차 사업이 완료된 이후라고 했다. 도대체 언제?
사실 그대로 그냥 돌아서고 싶고 아무것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없을 정도였지만 제부에게 말해 줄 것은 있어야 하기에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가장 싼 가격의 자리는 나무의 크기가 내 무릎 높이 정도로 작은 것이었고 옆에 있는 다른 나무와의 간격도 좁았다. 나무의 크기는 지금 조성된 상태 그대로 유지하도록 관리한다고 했고 묘지들 간의 간격이 좁아서 나무가 조금만 더 자라도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지나다닐 수도 없는 상태가 될 것이 뻔했다. 아버지의 잔디장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고 가격은 잔디장의 스무 배 정도였다.
윗 줄로 갈수록 나무의 크기가 커지고 아랫줄과의 간격이 조금 더 넓어지기는 하지만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무기한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비싼 가격을 눈가림하는 것 같지만 오전에 내가 봤던 산자락에 위치한 수목림의 멋진 풍경과는 너무나도 다른, 개인집 마당에 잔디 깔고 나무 몇 그루 심어놓은 듯한 모양새를 보고는 정말 깜짝 놀랐다. 상주라서 빈소의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 제부를 그 자리에 데려다 보여줄 수 없는 것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 묘지터는 논밭 사이에 갇혀있는 평지이고 경치라고는 논밭과 비닐하우스와 황토흙뿐인 것이 가격은 내가 오전에 보고 온 곳보다 3배 이상 비쌌다. 영구적으로 가질 수 있으니 그 가격이면 싼 것이라고, 자기들이 영구히 관리를 해주니 선산 관리보다 쉽다고 말하는데도 믿음이 가지 않았다.
만약 2차 허가가 안 나면? 업체가 도산해 버리면? 진입로를 새로 건설해 주지 않으면? 이미 일시불로 돈을 다 받았는데 영구히 관리해 준다고? 인건비는 어디서 나오지? 등등 의구심만 가득했다.
결국 장지는 아침에 봤던 곳으로 정했다.
갑작스러운 가족의 죽음으로 경황이 없는 유가족들은 모든 절차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 볼 겨를이 없다. 그래서 평소에 건강할 때 미리미리 사후처리에 관한 이야기를 서로 주고받을 필요가 있다.
내가 묻히고 싶은 곳은 어떤 곳인지, 장례식은 가족과 가까운 친척만 참석할 것인지, 어떤 옷을 수의로 입고 싶은지...
전에는 죽음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불편하고 뭔가 불길한 느낌이었다. 몇 년 전에 엄마가 떠나고 작년에 아버지와 시어머니, 올해는 사촌동생까지 떠나고 나니까 지금은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여겨진다.
나의 시아버지께서는 대학병원에 시신기증 서약을 하셨다. 그렇더라도 최후의 선택은 유가족이 하는 것이기에 추후에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남편은 자기가 죽으면 장례식도 하지 말고 바로 화장해서 뿌리라고 말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오래 살면서 나 먹여 살릴 궁리나 하셔!"라고 핀잔을 준다. 그래놓고 딸들한테 이렇게 말한다.
"나 죽고 나서 이모 옆자리 비어 있으면 거기 묻어주고 아님 비슷한 데에 묻어주라, 꼭!"
"그럼 아빠는?"
"그 위에다 대충 뿌려, 까짓 거..."라고 남편이 말한다.
왜 내가 먼저 갈 거라고 생각하는지 요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혼자 있긴 싫다.
가는데 순서 없으니 누가 먼저 갈지 모르고 나중에 생각이 바뀔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것이 진심이고 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아름다운 것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이유도 우리의 삶이 유한하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