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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 리브로 Jul 09. 2023

부러진 굽

그 여자 김미선 6

여전히 서먹서먹했다.

여자는 늘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하려고 애썼으나 희진은 건성건성 대답했고 마음속에선 여자에 대한 혐오감이 올라오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여자의 허연 속살도, 친해지려는 의도로 수시로 안고 다독이려는 몸짓도, 짙은 화장과 목소리도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아빠와 어떻게 만났는지 이야기할 때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고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며칠 동안 조금씩 쌓아 올린 친밀감이 한순간 무너져버렸다.

희진이 엄마라고 불렀다며 저녁에 퇴근한 아빠에게 들뜬 목소리로 자랑하듯 이야기하는 여자가 그저 한심하고 유치해 보였다. 그리고 어느새  호칭 없는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버렸다.


집에 돈이 없다고 했다.

병원비가 너무 많이 들어서 힘들다고 택시비를 아껴야 하니 병원까지 걸어 다니자는 여자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속이 메스껍고 쥐어짜듯이 아픈 증상은 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빨리 걸으면 장이 울리면서 아프기도 했지만 걷는 것은 괜찮았다. 걷기에는 꽤 먼 거리였지만 하루에 한 번만 가면 되니 딱히 할 일도 없는 희진으로서는 시간을 보내기에도 좋았다.


그날도 그랬다. 여자와 나란히 걸어서 소아과에 갔다.

오전이었지만 여름의 햇빛은 따가웠고 여자의 작은 양산 아래의 그늘로 숨기 위해서는 팔짱을 낄 수밖에 없었다. 높은 굽의 구두를 신은 여자는 TV 영화에서 본 마릴린 먼로처럼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걸었다.

"O지영~~"

희진은 카운터에서 이름을 부르자 벌떡 일어나서 진료실로 들어갔다. 항상 사촌 동생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속이 뜨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했다. 그러나 또각또각 구둣소리를 내며 뒤따라 들어오는 여자가 신경에 거슬렸다. 희진은 사촌 동생과 한 살 차이일 뿐이지만 고모의 나이로 보기에는 여자가 너무 젊다는 것을 늘 의식했다.

의사는 희진의 웃옷을 들춰 목까지 올리고는 차가운 청진기를 가슴과 배, 등에 갖다 대고 소리를 들었고 좁은 침대에 누우라고 하더니 살찐 손가락으로 배를 쿡쿡 눌렀다.

"아야! 아아!"

두꺼비를 닮은 의사는 똑같은 약을 계속 먹으라고 하고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내일 또 오라는 말을 덧붙였다.

다행히 엉덩이 주사는 두 대에서 한 대로 줄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소아과에서 나와서 걷다가 큰 도로의 횡단보도를 건넌 후 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 시멘트 다리는 버스가 다니는 도로이기도 하고 다리의 양쪽 가장자리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인도다. 햇빛은 더 강렬해졌고 바람 한 점 없는 날이었다. 더워서 터벅터벅 느린 걸음으로 걷는 희진의 옆에 바짝 붙어서 걷던 여자가 갑자기 "어머!"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더니, 기우뚱 넘어질 뻔하며 다리의 난간을 붙잡고 균형을 잡았다.

희진이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을 때 여자는 울상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가 일으켰다.

"어쩌지? 구두 뒷굽이 부러졌어. 집까지 가려면 한참 남았는데... 택시 탈 돈도 안 가져왔는데..."

희진도 난감했다. 집까지 30분 이상 걸어야 하는데 맨발로 걸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안 되겠다. 희진아 네 운동화를 내가 신어야겠어. 내 등에 업혀!"

"???"

"얼른 업혀. 자, 어서!"

싫었지만 싫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다리를 건너고 냇가 옆길을 지나 집까지 가는 길은 시멘트 도로였다. 다 큰 희진이 애기처럼 업히기 싫다고 짜증을 낸다 한들 어쩔 것인가.

창피했다. 여자는 풍만한 몸집이었지만 희진과 키가 거의 같으니 다 큰 아이를 업고 걷는다는 것이 힘들 것이 뻔했다.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어 보이자 희진은 운동화를 벗어서 여자의 발 앞으로 밀고는 여자의 구두를 양손에 한 짝 씩 받아 들었다. 등을 대주려고 엉거주춤 앉았던 여자는 희진이 등에 업히자 "끄응"소리를 내면서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여자가 천천히 한 발 씩 움직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나 아빠의 등에 업혀본 것이 언제였더라?

아마 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희진의 작은 몸이 넓은 등에 편하게 엎드릴 수 있었고 귀를 바짝 댄 등을 통해서는 할머니나 아빠의 말소리가 울려서 들렸다. 할머니가 노래를 불러주시기도 했다.

'맞아, 내가 밥을 먹다가 생선 가시가 목에 걸려 아파서 울 때였어. 노랫소리를 들으면서 울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때 가시는 어떻게 됐었더라?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내려갔던가?...'

생각에 집중을 해보려 했지만 희진의 몸이 여자의 엉덩이 아래로 미끄러지고 그럴 때마다 여자는 희진의 양쪽 허벅지 아래를 받치고 있던 양팔에 힘을 다시 주면서 자세를 바로 잡았다. "끙"소리와 함께...

희진은 여자의 등에 귀를 대고 편히 기댈 수가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거리며 보는 것 같았고 자기랑 같은 키의 여자에게 업혀있는 꼴이 남보기에 창피해서 얼굴을 숨기고 싶었다. 이마를 여자의 등에 대려고 했으나 등을 구부정하게 구부려도 이마는 여자의 뒷목덜미에 닿았다.

흔들흔들 지나치는 풍경과 버스들, 사람들의 모습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았다. 마치 눈을 감으면 아무도 자기의 얼굴을 못 볼 것처럼...

집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희진의 손끝에서 흔들거리는 구두를 여자의 손에 넘겨주기 위해 한 번 멈추어서 잠깐 쉬었다. 구두를 들고서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기가 어려워서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숨을 헐떡거리며 걷고 있는 여자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버리고 싶은 심정의 희진도, 아무 말 없이 태양 아래서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건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희진은 창피하면서도 미안했고 여자의 처지가 불쌍하면서도 짜증이 났다.

'그러게 누가 뾰족구두를 신으래?'

괜히 여자를 마음속으로 탓하며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여자의 가쁜 숨소리가 찻길의 소음보다 더 크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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