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진이 학교에 안 나간 지도 어느새 한 달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소아과에서는 이제 그만 와도 된다며 먹는 약만 지어주었다.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겠구나 싶어서 희진은 너무 좋아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할머니는 전화를 받자마자 "오늘 학교에서 전화가 왔어야. 곧 여름방학 성적표를 낸다고 와서 시험을 보라드라."라고 하시더니 "기말고사가 끝났응께 교무실에 가서 혼자 따로 시험을 봐야 한단디..." 하는 말도 덧붙였다.
다음날, 희진은 미선의 손에 이끌려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몇 년 만에 가는 학교처럼 모든 게 낯설고 어색했다. 전학 온 지 두 달 만에 아파서 한 달가량 결석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눈이 작고 얼굴이 까만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 활짝 웃으며 여자에게 인사를 했다.
"희진이 어머님이시군요! 미인이십니다, 하하하."
"어머, 아니에요, 호호..."
선생님은 희진의 머리를 투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희진이는 많이 좋아졌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네에..."라고 말하는 희진에게 선생님은 교무실 옆의 작은 교실을 가리키며 들어가서 기다리라고 했다.
선생님이 가져다 주신 세로로 긴 시험지를 한 장씩 앞뒤로 넘겨가며 문제를 풀었다. 아는 것도 많았고 알쏭달쏭한 것도 있었다. 어떤 것은 배우지 않아서 그냥 대충 찍기도 했다.
월말고사 때는 지필고사를 보지 않는 음악, 미술, 체육까지 문제를 풀어야 했지만 2시간도 채 되지 않아 전 과목 시험을 다 끝냈다.
중간에 두어 번 미닫이 문을 열고 확인을 했던 담임 선생님이 시험지를 걷어갔고, 희진은 교무실에서 나온 미선의 손을 잡고 교문을 나섰다.
미선이 말했다.
"다음 주에 방학한대. 희진이 너는 그냥 집에 계속 있다가 개학하면 등교하라고 하시더라."
"......"
"많이 쉬니까 좋지 않아?"
"몰라요."
"왜? 학교에 가고 싶니?"
"아니요."
희진은 기분이 이상했다. 집에만 갇혀 있을 땐 학교에 오고 싶었는데 막상 학교에 오니 낯설고 무서웠다.
'친구들이 날 잊어버린 건 아닐까? 다시 친해질 수 있을까? '
"너네 선생님이 나더러 젊고 미인이래, 호호호..."
희진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디가 미인이라는 거지? 화장만 짙게 했지. 이쁜 데가 어디 있다고, 참나...'
이쁘다는 말보다 젊다는 말에 희진은 더 기분이 나빴다. 5학년이 된 딸을 두기에는 여자가 너무 어려 보인다는 말로 들렸다. 지금쯤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모여 앉아 쑥덕거릴 것만 같았다.
미선은 희진의 손을 꼭 잡고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목청을 높여 말했다.
"어머님, 저희 왔어요."
할머니가 창호지 바른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오셨다.
"오냐, 어서들 오너라!"
"할머니!"
희진은 소리치며 마루로 뛰어올라 할머니를 끌어안았다.
"아이고! 넘어지것다!잘 지냈냐? 살이 쑥 빠졌구만!"
"죄송해요, 어머님. 희진이가 밥을 잘 안 먹어서요..."
미선은 정말 죄송하다는 듯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튀어나온 커다란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 같았고 그 모습에 희진은 짜증이 솟구쳤다. 정말 싫었다. 불쌍해 보이는 것, 당당하지 못하고 약자처럼 보이는 것이 너무 싫었다.
"입맛이 없었다고! 할머니가 해 준 반찬이 먹고 싶었다고!"
희진은 괜히 심통 난 목소리로 항변했다.
"아픈 사람이 뭔 입맛이 있었것냐? 밥 해 먹이느라 니가 고생했다. 희진아, 이따가 저녁밥 먹고 갈래?"
"안가! 이제 병원에도 안 가도 된다고 했는데 뭐 하러?"
"희진아, 네 옷이랑 책을 안 챙겨 왔는데...약도 안 가져왔고."
미선은 다급히 말했다.
"괜찮아! 내일 아빠한테 가져오라고 하면 되지, 뭐."
미선의 얼굴엔 서운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럴래? 그럼 희진이는 두고 가거라. 피곤할 텐데 얼른 가서 쉬어야지..."
미선은 방에 들어가 김여사와 잠깐 얘기를 나누더니 곧 일어나 작별인사를 했다.
"희진아, 잘 있어. 다음에 집에 놀러 와."
"..."
희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 집에 다시 갈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문간에서 할머니 김여사 옆에 바짝 붙어 선 희진은, 김여사에게 허리를 숙여 다소곳이 인사하는 미선이 축축해지는 눈꺼풀을 빠르게 깜박거리는 것을 보았다.
미선은 고개를 들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희진에게 손을 흔들었다. 희진도 손을 흔들었지만 웃어주지 않았다.
뭔지 모를 슬픔 같은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미워하는 대상을 미워하는 것에 대한 미안함 같은 것이었다.
길고 좁은 골목길을 걸어 나가는 미선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희진이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는 그 순간 골목 입구에 선 미선이 잠깐 뒤돌아보는 것이 보였으나 희진은 다시 내다보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면 왠지 미선을 따라가야 할 것만 같았다.
드디어 집에 왔다.
그리웠던 할머니의 품으로...
곧 울 것 같았던 여자의 얼굴과 골목길에서 멀어져 가던 여자의 뒷모습이 자꾸 떠올랐지만, 희진은 그 집에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다시는 안 갈 거야! 절대로 안 간다고!'
가지 않겠다고 다짐할수록 더 그 집이 생각났다. 거실의 불투명한 유리창문으로 들어오는 뿌연 햇살과 소파 끝에 있는 벽의 모서리를 장식하고 있던 코스모스 조화 바구니.
'코스모스 몇 송이를 가져올 걸 그랬어...'
여자가 사용하는 공업용 미싱과 만들고 있던 이불이 넓게 펼쳐진 채 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작은방.
희진이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의 끝 단은 미선이 이불 커버를 만들고 난 자투리 천으로 프릴을 만들어 달아 준 것이다.
작년에 산 원피스가 짧아져서 길이를 늘이기 위해 넓은 프릴을 캉캉치마처럼 덧대어준 것인데 원래의 옷감과 재질이 너무 달라서 싫었다.
민소매 원피스의 상체 부분은 흰색이고 허리 아래쪽의 스커트 부분은 선명한 하늘색과 분홍색, 그리고 보라색이 각각 넓게 구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맨 아랫단이 어정쩡한 핑크색의 뻣뻣한 천으로 길이가 연장된 것이다.
더군다나 이불을 만든 자투리 천이라니!
생각이 자투리 천에서 이불 만드는 광경으로 옮겨가자 희진은 갑자기 원피스를 벗어 던져버리고 싶어졌다.
반바지와 티셔츠로 갈아입은 희진은 TV를 켜고 만화영화에 빠져들었다.
미선에 대한 생각은 금세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미선의 슬픈 얼굴도, 골목길에서 멀어져 가던 뒷모습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