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의 이름은 김미선. 나이는 스물아홉.
희진은 열두 살.
여자는 틈만 나면 희진에게 자신을 엄마라고 불러보라고 했다.
말없이 고개를 젓는 희진에게 서운했는지 입을 삐죽거리더니 금세 눈시울을 붉히다가 훌쩍거리기도 했다.
"왜 날 엄마라고 부르기 싫어? 네 아빠랑 결혼할 건데 그러면 내가 네 엄마가 되는 거지."
"......."
"한 번만 해봐, 엄마라고."
"......"
"내가 싫어?"
그렇게 묻는 여자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려고 했다.
여자의 물음에 입술을 꼭 다문채로 고개를 저었다. 싫다고 했다가는 여자의 일그러진 얼굴과 아이라인 때문에 검은 물이 되어 흐르는 눈물을 보게 될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열일곱 살 나이 차이가 나는 엄마가 어딨어요?' 라는 말이 목구멍에 걸린 채 내려가지 않는다.
희진은 여자의 눈물이 진저리 나게 싫었다. 자기 때문에 여자가 운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고 여자의 행동이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자주 울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희진을 보고 훌쩍거렸고 엉덩이에 수건 찜질을 할 때마다 희진이 짜증 내는 것에도 눈물을 훔쳤다. 집에 가고 싶다고 우는 희진에게 자기가 뭘 잘못했느냐며 눈물을 글썽였다.
짙은 화장과 향수 냄새, 풍만한 몸, 착 가라앉은 저음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언젠가 삼촌의 책상 서랍에서 몰래 꺼내 읽은 만화 잡지에 등장하는 사이보그 여자에게 어울릴 것 같았다.
그냥 다 싫었다, 그 여자의 모든 것이.
도대체 저 여자의 어디가 좋아서 아빠는 같이 살고 싶은 걸까? 엄마가 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이렇게 사는 것은 너무 싫어.
저 여자를 어떻게 엄마라고 부를 수 있지? 엄마가 아니잖아! 난 엄마가 필요 없다고!!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부르짖었다. 정말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했다가는 여자의 통곡에 홍수가 날지도 모르니까.
그날도 아빠는 아침 일찍 출근을 했고 오전에 청소와 빨래를 끝낸 여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부엌에서 열심히 무언가를 만들었다.
희진이 안방에서 부엌으로 연결된 문을 살짝 열고 내다보자 여자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맛있는 냄새나지? 볶음밥 만들어 줄게, 조금만 기다려 봐, 희진아."
맛있는 냄새가 나긴 했다.
여자는 부뚜막에 쭈그리고 앉아 잘게 썬 감자와 당근, 양파를 볶고 달걀도 풀어서 저어가며 익혔다. 그런 다음 하얀 밥을 넣고 섞다가 마지막엔 미리 데쳐둔 초록빛 완두콩을 넣었다. 볶음밥은 접시에 예쁘게 담겼고 희진은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처음 보는 볶음밥이었다.
할머니가 해주시는 볶음밥은 항상 양은 냄비에 참기름을 붓고 새콤하게 익은 김치를 달달 볶다가 찬밥을 넣어서 섞어주는 빨간 김치볶음밥이었다.
여자와 둥근 밥상을 사이에 두고 방바닥에 마주 앉은 희진은 밥숟가락에 가득 퍼올린 볶음밥을 허겁지겁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어때? 맛있어?"
"?!"
희진은 밥을 꾸역꾸역 억지로 삼키는 모습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 맛없어?"
"......"
희진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순간 여자는 일그러지는 얼굴을 두 손으로 재빨리 가렸다. 그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죽여 흐느꼈다.
희진은 당황스러웠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다시 밥수저를 들었다. 덜 익은 감자와 완두콩, 싱거운 밥... 잘 넘어가지 않는 밥을 억지로 삼키려니 짜증이 치밀어 올랐고 눈물을 닦고 있는 여자의 모습에 화가 났다.
결국 희진도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엉엉엉... 집에 갈 거야! 할머니한테 가고 싶어! 집에 보내줘!!! 엉엉엉..."
여자는 화들짝 놀라 희진에게 바짝 다가앉더니 끌어안고 등을 다독였다.
"울지 마! 미안해, 내가 먼저 울어서 그런 거지? 미안해, 희진아. 울지 마, 응?"
희진은 여자를 밀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몸을 뒤틀어 여자의 품에서 벗어나 등을 돌리고 앉아 울었다.
여자는 부엌으로 나가 흐느껴 울었다.
한참을 울고 나니 화가 가라앉는 것 같았지만 희진은 마음이 무거워져 있었다. 여전히 부엌에서 여자의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볶음밥을 만들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라 미안해졌다.
문을 슬그머니 열고 내다봤다. 방문을 등지고 부엌 바닥에 앉아 무릎을 양팔로 끌어안고 고개 숙인 여자가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희진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울지 마... 그만 울어... 밥 먹을게..."
여자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고개를 들지 않았고 흐느끼는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희진은 자기 때문에 여자가 운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무뚝뚝하게 대한 것까지 한꺼번에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울지 마... 그만 울어, 엄...마..."
마지막 단어를 모기만 한 소리로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설움이 북받쳤다.
그 단어는 그렇게 슬픈 것이었다.
슬픈 볶음밥처럼...
여자는 벌떡 일어나 몇 걸음에 후다닥 문지방을 넘어오더니 희진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흐느끼며 말했다.
"고마워. 고마워, 희진아..."
희진은 후회했다. 시간을 바로 되돌리고 싶었다.
'괜히 그렇게 불렀어! 다시는 안 부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