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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 리브로 Aug 25. 2023

그 남자의 딸

그 여자 김미선  11

미선은 요즘 희진을 자주 생각한다.

어리지만 뭔가 대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는데 그것이 뭐라고 딱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예견된 어려움이었으나 이겨낼 자신이 있었다. 그 남자의 딸을 1년 전 처음 만났을 때, 남자를 꼭 닮은, 똘똘해 보이지만 수줍음이 많은 아이를 대면하고서 느꼈던 편안함은 혼자만의 착각이었을까?

미선은 자신이 그 남자를 사랑이 식어버린 무미건조한 결혼 생활에서 구원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그의 딸 희진이 자라는 동안 받지 못 한 엄마의 사랑을 듬뿍 줄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렇게 예쁘고 귀여운 아이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희진이 만만한 상대가 결코 아니라는 걸 차츰 알게 됐다. 열두 살의 여자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게 도통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수두에 걸린 이후 크게 아팠던 아이를 데리고 있는 동안엔 된통 시집살이를 하는 것 같았다. 아프다고 종일 찡그린 얼굴에  걸핏하면 할머니에게 가고 싶다며 희진은 울었다. 요리책을 봐가며 이것저것 음식을 만들어 줬지만 입맛이 없다며 잘 먹지 않았고 맛있다고 말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매일 병원에 데리고 다니며 함께 고생을 했지만 둘 사이는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다.


미선은 희진과 많은 얘기를 나누며 친해지고 싶었다. 그 나이의 여자애들은 한참 조잘거리며 이것저것 관심사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젠가 희진이 "우리 아빠는 어떻게 만났어?"라고 갑자기 물었을 때 미선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희진이 먼저 말을 걸어준 것만 해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어... 그거? 있잖아, 아빠가 일하는 학원에 내 남동생이 다니고 있었어..."

미선의 남동생이 중장비 자격증 시험 준비를 위해 학원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미선은 동생을 만나러 학원에 다.

학원 수업이 끝나는 동생을 만나서 맛있는 저녁식사를 함께 먹으며 응원하려는 생각이었다. 학원의 사무일에서 잠시 앉아 기다리라며 안내해 준 남자 직원은 따뜻한 차를 건네며 친절하게 몇 마디 건네주었고, 자신도 수업에 들어가야 하니 조금만 더 앉아 동생을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후로도 한두 번 더 동생을 만나러 갔다가 잠시 스치듯  얼굴을 보았던 그 남자에게 미선은 약간의 호감을 느꼈다. 동생이 자격증을 취득하자 도움을 많이 주신 선생님께 식사대접을 하고 싶다고 했을 때 미선은 동행했고 그 남자와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소도시의 상업고등학교를 나온 미선에게는 대학을 나왔다는 그 남자의 지적인 분위기와 어딘지 우수에 찬 표정, 어떤 주제든 막힘 없이 대화를 이끌어가는 자신감 있는 모습이 멋있게 보였다.

졸업 후 몇 년 동안 작은 회사의 경리로 일하다가 그만두고 홈패션을 배운 미선은 시내의 큰 이불집에서 실전을 익히며 경력을 쌓는 중이었다.

서로의 일터가 가까운 두 사람은 일찍 퇴근하는 주말엔 데이트를 즐겼다. 남자는 아내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곧 이혼할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이 만나기 시작한 후 몇 달이 지나자 미선은 희진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면 그의 첫 딸의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생모의 얼굴을 모르고 할머니  손에서 자란 아이라고 하니 더 마음이 쓰였다.

희진을 처음 만난 날, 수줍음이 많고 조용한 아이는 아빠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아빠를  많이 닮았고 을 때 양쪽 볼에 보조개가 깊게 들어가 예뻤다.




희진을  데리고 있었던 여름, 어느 날 미선은 화장하는 모습을 옆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던 희진에게 "어때? 예뻐?"라고 물어봤다. 그때 희진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왜 그렇게 진하게 화장해? 아빠가 예쁘대?"

"응? 아빠? 돼지도 진주 목걸이를 하면 이뻐 보인다고 말하더라."

"크크크큭. 그럼 돼지처럼 못 생겼다는 거네!"

".....? 그래? 예쁘다는 말이 아니고? 예뻐 보인다는 거잖아!"

"돼지도 이뻐 보인다며? 크크크크..."

"치이...! 아무튼 예쁘다고 했어!"

"그런데 진짜 신기하다. 화장하니까 주근깨가 하나도 안 보이네."

미선은 외출할 때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공들여서 꼼꼼히 화장을 한다. 기초부터 여러 단계의 덧바르는 화장품의 종류와 개수도 많다. 눈두덩이에 아이섀도를 바르고 아이라인을 짙게 그린 후 속눈썹에 마스카라까지 짙게 바르고 나면 화장하기 전과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된다. 한 번쯤은 희진이 화장품을 발라보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 뚫어지게 쳐다보면서도 그런 내색은 없었다.

"눈 화장 해줄까? 한 번 해볼래?"

미선의 말에 희진은 바로 대답했다.

"아니. 싫어."

아까 희진이 모처럼 깔깔거리면서 웃을 땐 좋았는데 미선은 다시 기분이 가라앉고 말았다.


미선은 외출할 때 늘 치마를 입고 꼭 끼는 거들로 아랫배와 허벅지의 살들을 감춘다. 그렇게 입으면 허리는 잘록하고 가슴과 엉덩이는 풍만해 보이는 콜라병 몸매가 되는데 그런 자신의 모습을 화장대의 거울에 비춰보다가 희진과 눈이 마주쳤다.

"나, 어때? 뚱뚱한 거 같아?"

"모르겠는데... 거들 입기 전보다는 날씬해."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말하던 희진이 덧붙였다, "아빠는 진한 화장이랑 꼭 붙는 옷을 싫어하는데..."

"아닌 것 같은데? 그런 말 한 번도 안 하던 걸?"

미선이 향수를 목덜미와 치맛자락에 뿌리며 말하자 희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냄새가 너무 강해. 머리 아플 것 같아!"

미선도 살짝 기분이 상한 듯 말했다.

"왜? 비싼 거야. 다들 향기가 좋다는데 넌 좀 유별나다!"

"아빠도 화장품 냄새 강한 건 싫어한다고!"

"아닌데? 이 향수 네 아빠가 사 준거야!"

미선의 그 말에 희진은 입을 꾹 다물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




희진이 여름방학 동안 함께 지내다가 할머니 집으로 가버리자 미선은 까다로운 환자의 시중에서 벗어나 홀가분하면서도 서운했다. 매일 병원에 데리고 다니고 찜질을 해주고 음식을 만들어 주며 함께 보낸 시간이 힘들긴 했지만 막상 아이가 가버리고 나니 종일 혼자서 적막하고 쓸쓸하다. 이불이나 커튼의 납품기일에 맞추느라 바쁘게 미싱을 돌리는 것이 주된 일과지만 사람이 하나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 사이 정이 들어서 목소리라도 듣고 싶지만 개학을 한 희진은 학교에 다녀오면 피아노 학원에 갔고 동네의 아이들과 뛰어노느라 집에 붙어있지 않았다. 어쩌다 전화를 걸면 희진의 할머니가 받았고, 미선은 아직 시어머니라고 부르기엔 애매한, 그렇다고 '어머님' 말고 달리 부를 호칭이 없는 그와 통화를 하는 것이 어색하고 어려웠다.

"그래, 너도 잘 지내지? 희진이 들어오면 전화 왔다고 전해주마."

다행히 상대방도 이것저것 묻지 않고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혹시 희진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려나 기다려 보기도 했지만 전화벨은 울리지 않았다.


희진의 할머니로부터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미선은 마침 시골집에서 키우는 진돗개가 낳은 새끼들 중 한 마리를 팔지 말고 두라고 어머니에게 얘기해 놓았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희진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고 그 핑계로 희진을 만나고 싶었던 미선이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희진은 기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강아지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은 머뭇거림에 갑자기 서러움이 올라오려는 걸 참고 있던 미선에게 희진은 마지못해 좋다고 말하는 듯했다.


미선은 생각한다, '애가 어린애 답지 않게 매사에 너무 심각하다니까.'



*표지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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