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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 리브로 Aug 29. 2023

용의 검사(체육 시간)

그 여자 김미선 12

체육 시간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놀이 시간이다.  대부분은 그렇다. 전학을 오기 전에는 희진이도 체육 시간이 제일 좋았다. 달리기를 잘하고 피구도 잘하고 정글짐을 거의 뛰어다니다시피 오르내리며 술래잡기도 잘했다.

하지만 이곳 동산국민학교로 전학 온 이후 체육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 되고 말았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전 과목을 모두 담임 선생님이 가르쳤는데 이곳에는 음악, 미술, 체육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따로 있다.

체육 선생님은 키가 작고 새까만 피부에 고약하게 인상을 고 있는 나이 든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호루라기를 기다란 줄에 매달아 목에 걸고 손에는 나무를 매끈하게 깎아서 만든 길고 두꺼운 매(사실 방망이에 가까웠다)를 들고 있었다.

아이들이 선생님의 설명을 듣지 않고 잡담하거나, 줄지어 서야 할 때 줄이 비뚤어지거나 하면 나무 방망이로 손바닥이나 엉덩이를 가차없이 때렸다. 때로는 발로 걷어 차기도 한다.

희진은 소심해서 체육 시간마다 잔뜩 긴장을 한 채 선생님의 모든 지시에 귀를 기울였고 친구에게 말을 걸지도 않는다.

가장 싫은 것은 매월 첫 체육 시간에 하는 의 검사다.

잘 씻지 않고 다니는 아이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라는데, 무서운 얼굴로 교탁 의자에 앉아 있는 선생은, 번호 순서대로 몇 명씩 나가 한 줄로 서게  한 후 모든 학생들에게 웃옷을 들추고 맨몸을 보이도록 지시한다.

남자 선생님 앞에서 가슴까지 보이도록 웃옷을 들어 올리는 일이 너무나 싫었고 뒤에 앉아 있는 남자 애들도 보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끔찍했다.

그것은  남자 의사 앞에서 옷을 올리는 것과는 뭔가 한참 다른 상황이다. 의사는 청진기를 대보고 소리에 집중하면서 시선을 환자의 옆에 두거나 뒤 혹은 발치의 바닥을 응시한다.

체육 선생은 가슴과 옆구리를 샅샅이 훑으며 때 한 줌이라도 찾아내려는 듯  진지하게 아이들의 몸을 살폈다.


희진은 오늘 용의 검사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고 일요일 낮에 할머니와 함께 대중목욕탕에 가서 때를 박박 문질러 씻고 왔다.

남자 애들은 늘 그랬듯이 대부분 아무렇지도 않게 웃옷을 벌러덩 뒤집어 올렸다.

씻지 않아서 땟국물이 줄줄 흐르는 몇몇 아이들만 머뭇거렸고 손바닥 몇 대를 맞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거나 귓불까지 빨개진 채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여자 아이들 중 깜박 잊고 목욕을 하지 않은 아이들은 옷을 올리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호된 꾸지람을 들었고 그냥 손바닥을 맞겠다고 했다가 눈물이 쏙 빠지도록, 남자애들보다 더  세게 맞았다.

희진은 자기 차례가 다가오자 심장이 쿵쿵 뛰는 소리가 귀에 들릴 지경이었지만 숨을 한 번 꾹 참고 얼른 웃옷을 올렸다.

"좋아. 옆으로 돌아봐. 됐어. 통과."

선생의 지시는 짧고 명료하게 끝났고 희진이 제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쿵쾅거리던 심박동도 차분해졌다.

키가 크고 발육이 좋은 여자애들 몇몇은 계속 심란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미 봉긋하게 올라온 젖가슴에 브래지어까지 입고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키가 커서 뒷번호인 그 아이들의 차례가 되자 누구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누구는 울상이 되었고 또 어떤 애는 씩씩거리며 뒤에 앉은 남자애들에게 눈을 흘겼다.

남자애들은 벌써부터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조용 조용! 어떤 놈들이 지금 떠드는 거야, 엉?"

교탁을 내리치는 방망이 소리와 천둥 같은 체육 선생의 목소리가 동시에 귀를 찢는 듯했다.

아이들은 일 순간에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다음, 누구야? 얼른 나와!"

반에서 까불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경원이가 터벅터벅 교탁으로 나가 선생 앞에 서더니 훌러덩  웃옷을  올렸다가 내렸다. 1초도 안 되는 순간이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다시 큭큭큭 웃음소리가 났다. 이번엔 여자애들도 함께 웃었다. 희진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야 인마, 다시 안 올려?"

훌렁~ 경원이가 또 한 번 똑딱 1초 만에 옷을 올렸다가 내렸다. 크크크큭... 아이들은 웃음을 참다가 깔깔깔 터지고 말았고 선생의 얼굴은 시뻘게졌다.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해? 엉?"

선생의 고함소리가 커지자 다시 아이들의 웃음이 뚝 끊겼고 잠깐  망설이는 듯하던 경원이 체념한 듯 천천히 셔츠를 올렸다. 하얀색의 주니어용 브래지어가 보이고 남자애들이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앞뒤로 훑어보던 선생이 "됐어. 다음!" 하고 말하자 잽싸게 셔츠를 내리며 제자리로 돌아오면서 경원이는 킥킥대던 남자애들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고 뻗어 보였다.

'니들은  죽었다, 쉬는 시간에... 쌤통이다!'


경원이가 첫 타자로 나선 후, 2차 성징이  나타난 뒷자리의 여자애들은 모두 용감하게 용의 검사를 마쳤다.

깨끗이 안 씻었다는 평을 듣고도 당당하게 "어제 엄마랑 목욕탕에 갔다고요!"라고 항변하는 아이도 있었다.

마지막 순서인 금희는 웃옷을 올리고도 양팔을 교차해서 가슴을 가리고  있다가 혼이 났는데, "남자애들이 웃는다고요!"라고 볼멘소리로 말하자, 체육 선생은 다시 교탁을 내리치며 아이들을 향해 "조용히 해, 이 놈들!"하고 소리를 질렀다.

희진이라면 그런 말대꾸는 꿈도 꾸지 못 할 일이다.


희진은 아직 2차 성징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하지만 가슴에 몽우리가 잡히지 않았어도 남에게 가슴을 보이는 것은 창피하다.


저녁에 미선의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지내? 학교는 재밌어?"

"아니, 오늘 체육시간에 용의 검사를 했어."

"손톱 잘랐는지 검사하는 그거?"

"손만 보는 게 아니고..."

"그럼? 머리도?"

"그것도 보는데... 가슴까지 옷을 다 올리라고 해."

"어머, 별 일이야, 호호호..."

희진은 미선의 웃음 소리에 기분이 나빠진다. 별 일이라고 말하면서 별 일도 아닌 것처럼 웃는 그 여자랑 말하고 싶지 않다.

문득, 미선이 5학년 교실에 앉아 용의 검사를 받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뒷자리에 앉아있던 여자애들처럼, 아마 금희처럼 큰 가슴을  갖고 있었을거야...'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미선의 얘기를 건성으로 들으면서,

미선이 속옷 차림으로 껴안는 것이 너무나 싫었던 지난 여름 방학을 떠올렸다.



*표지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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