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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 리브로 Aug 15. 2023

그 여자의 엄마

그 여자 김미선 10

"희진아, 강아지가 죽었다며? 정말 안됐다. 오늘 아침에 할머니한테 얘기 들었어. 우리 희진이 강아지 좋아하는데 얼마나 슬펐을까 생각하니 내가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

"......"

희진은 대꾸할 말이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한동안 뜸했던 미선에게서 전화가 왔고, 잊고 싶었던 장면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이야, 우리 시골집에서 강아지를 장에 내다 판다는데 제일 이쁜 놈으로 하나 놔두라고 했다. 우리 희진이 줘야 한다고 엄마한테 말했어. 어때? 좋지?"

여자는 한껏 들뜬 목소리로 얘기했다.

"으.. 응..."

희진의 마지못한 반응에 눈치 빠르게 반응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침울해졌다.

"왜? 싫어? 내가 우리 엄마한테 얼마나 희진이 네 얘길 많이 했는데... 꼭 강아지를 줘야 한다고 신신당부도 했고..."

점점 작아져가는 목소리에 희진은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을 느끼며 다급히 말했다.

"응, 좋아. 강아지 보고 싶어."

"그치? 얼른 보고 싶지? 내가 요일에 너한테 갈게. 우리 같이 강아지 데리러 가자."

다시 활기찬 목소리로 돌아온 미선의 제안을 희진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주말 오후, 학교에서 4교시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온 희진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미선의 손에 이끌려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새로 만날 강아지에 대한 약간의 궁금증이나 기대감보다는 미선의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는 부담감이 커서 마음 내키지 않는 외출이었다.

5학년인 희진은 혼자서 버스를 타 본 일이 없었다. 집 근처와  학교  아니면 친구집에, 예전에 이사하기 전엔 고모네와 가까이 살아서 고모집이 있는 옆동네까지도, 걸어서 다녔지만 멀리 나갈 일은 없었다.

낯선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에서 간신히 빈자리 하나를 발견한 미선은 재빨리 의자에 앉았고 희진에게 무릎에 올라앉으라며 손을 잡아끌었다.

어린애도 아닌데 제 키만 한 여자의 다리를 깔고 앉을 수는 없으니 희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여자의 옆에 섰다. 한 손은 미선의 손에 꼭 쥐어진 채 다른 손으로는  미선의 앞 의자의 등받이 한쪽을 붙잡고 균형을 잡았다.


미선과 희진이 내린 곳은 희진이 가끔 할머니를 따라 버스를 타고 장 보러 갔던 큰 재래시장 앞 정류장이었다.

"배고프지? 짜장면 먹을래? 담양에서 오는 시외버스는 도착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어. 터미널이 바로 옆이니까  점심 먹고 가면 돼."

시장통에 있는 허름한 중국집은 손님들로 북적거렸지만 주문한 짜장면이 나오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배가 잔뜩 고팠던 희진은 허겁지겁 짜장면을 먹었다. 새콤달콤한 노란 단무지를 아삭아삭 맛나게도 씹으면서 배부르게 한 그릇 먹고 나니 시외버스가 곧 도착할 시간이라고 미선이 말했다.


버스터미널의 대합실은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고 있었다. 무거운 등짐을 진 사람들, 시장에 내다 팔 물건이 가득한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아주머니들,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여행가방을 든 젊은 사람들이 물결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대합실의 의자에도 시외로 가는 완행버스와 직행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있었다.

희진은  많은 인파 속에서 미선의 손을 놓칠세라 꼭 잡고 바삐 걸음을 옮겼다.

"아, 저기다! 저기 울 엄마 앉아 계시네!"

미선의 발걸음이 빨라지자 희진도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사람들 틈을 헤집고 앞만 보고 걷던 희진은 "엄마!" 하고 큰소리로 외치며 손을 흔드는  미선의 시선이 향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반백의 쪽진 머리에 흰색 한복을 입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미선과 희진을 번갈아 보았다.

미선과 희진이 바로 코앞에 이를 때까지 할머니는 희진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가까이서 보니  햇볕에 탄 검은 피부엔 검버섯과 깊은 주름이 많았고 왠지 슬프고 지쳐 보였다.

"엄마, 벌써 도착하셨네? 아직 시간이 좀 남은 줄 알았는데. 점심은 잡쉈고?"

"응, 그래. 먹고 왔다. 네가 희진이냐? 이쁘게도 생겼네..."

할머니는 미선을 쳐다보는 둥 마는 둥 하며 희진의 손을 꼭 잡았다. 거친 손의 굵은 손가락 마디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희진의 할머니보다 20년은 더 늙어 보이는 작고 마르고 맣게 그을린 쭈글쭈글한 피부를 가진 노인은 짙고 화려한 화장을 하고  있는 미선과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할머니는 거친 손으로 희진의 등을 연신 토닥이며 기운 없는 목소리로  미선과 짧은 몇 마디를 나누었다.

할머니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인 희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놓인 종이 상자 안에 들어있는 작은 강아지였다.

"아이고 많이 컸네, 그 녀석! 다른 애들은 다 팔렸고?"

"잉. 엊그제 시골 장날  다 내다 팔았재. 요놈이 제일 튼실하고 이쁘길래 뒀다가 데꼬 왔다."

"희진아, 강아지 이쁘지? 호호호... 어서 만져봐."

희진은 쭈그려 앉아 두 손으로 강아지를 쓰다듬어 보았다.

얌전히 웅크리고 있던 연한 갈색털의 동포동한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나 희진의 손을 핥고 팔에 기어오르려고 했다.

희진은 강아지가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강아지를 다 빼앗겨버린 엄마 개를 생각했고 냇가에 버리고 온 뽀삐가 생각났다. 가장 슬픈 것은 미선의 엄마인 시골 할머니의 얼굴에서 읽은 슬픔이었다.

거친 손으로 희진의 손등을 쓸며 "희진아, 세상에나... 얌전하기도 하지. 착하게도 생겼네..."라고 말하는 그 할머니에게 뭔가 잘못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미선을 미워하는 마음, 미선을 울게 했던 일들을 들키면 안 될 것만 같았다.

한사코 먼저 가라며 미선과 희진에게 손을 흔들던 할머니를 뒤로 하고 버스 터미널의 대합실을 나오며 희진은 울지 않으려고 쉼 없이 눈을 깜빡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고 앉아있는 미선의 다리 위엔 종이 박스가 올려져 있었다.

옆 자리에 앉은 희진은 뚜껑이 닫힌 박스의 옆 면에 뚫어 놓은 작은 구멍 속으로 손을 넣어 강아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강아지는 박스에서 나오려고 낑낑대다 희진의 손가락을 핥았다.


강아지를 빼앗긴 어미는 어떤 마음일까...

딸과 함께 사는 남자의 딸을 처음 만난 엄마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

지금 미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희진은 지치고 슬픈 표정을 한 작은 체구의 노인을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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