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생활 초기에 아버지는 안정제의 부작용 때문인지 몸을 잘 가누지 못했다. 늘 잠에 취해 있었고 식사시간에도 몸을 일으켜주면 힘없이 늘어지고 수저질도 힘들어했다.
어느 날, 아버지의 입에 죽 한 스푼이라도 더 떠 넣어주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식사보조를 하고 있던 나를 흘끗 보던 수간호사가 말했다. "00 선생, 이리 나오세요! "
"네~"하고 대답하며 얼른 병실 밖으로 뛰어나가니 총총걸음으로 복도를 걸으며 수간호사가 신경질적인 말투로 빠르게 말했다.
"지금 아버지 한 사람만 보고 있으면 어떡해요? 병실 다 둘러보면서 모든 환자들 식사 상황을 체크해야지!
식사보조는 여사님들 시키세요!"
모기만 한 소리로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맞는 말이었다. 식사시간에 간호사는 전체 상황을 파악하고 지휘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조무사와 요양보호사들에게 필요한 지시를 내리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먹지 못하고 옆에서 보조를 해줘야만 하는 환자들이 많았고 내 영역, 네 영역을 따지기 전에 원활하게 제시간에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서로 도와가며 일해야 했다. 단지 그날은 다른 직원들의 바쁜 손길을 돕는 나의 식사보조 대상이 아버지였을 뿐이었는데 마치 내가 다른 환자들은 안중에도 없고 나의 아버지만 챙기는 것 마냥 얘기하는 수간호사가 야속했다.
아버지는 섬망 증세가 심했다. 집에서는 전혀 보지 못 했던 모습에 난 괜히 아버지를 입원시켰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낯선 환경 속에 아버지를 가두고, 그곳에서 나가겠다고 온 몸으로 저항하니 약을 쓰고... 그래서 아버지의 상태가 더 악화된 것만 같았다.
아버지는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면서 허공에서 무언가를 만지는 듯한 손동작을 하기도 하고 기다란 무언가를 양손으로 훑는 듯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아부지, 뭐하세요?"
"어? 어... 기계에 기름칠하고 있다."
"아빠, 지금은 뭐하시는 거예요?"
"보면 모르겄냐? 실이 꼬여서 풀려고 그러는구만. 뭐 좀 꿰매야 겄는디..."
그러면서 정말 바늘이라도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엄지와 검지를 맞붙이고서 바늘을 쓰윽 통과시켜서 잡아당기는 듯한 동작을 했다.
간호사실 데스크 앞으로 걸어 나온 아버지는 대대장을 만나야겠다거나 팀장은 어디 갔냐고 찾기도 했다.
아버지의 공군 복무 시절이나 말년의 보험설계사 시절과 지금을 혼동하고 있는 행동을 자주 보였다.
여긴 병원이라고 설명해봤자 버럭 화를 내며 "방금 팀장이랑 이야기 나누다가 잠깐 어디 좀 다녀온 건데 무슨 소릴 하는 거냐?" 하고 이상한 사람 쳐다보는 눈빛이 되었다.
결국 "팀장님(또는 대대장님)은 잠깐 나가셨으니 들어오시면 연락드릴게요. "라는 대답을 듣고서야 아버지는 다시 병실로 발길을 돌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집에 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고 병원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아버지였지만 지켜보는 나의 마음은 많이 아팠다.
입원 초기에는 눈이 안 보여서인지 약에 취해서인지, 아마 둘 다였을 것이지만, 늘 누워서 지냈고 침대 아래로 내려오는 일도 화장실 갈 때뿐이었다.
많은 환자들이 그랬다.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환자들도 대부분 아무런 의욕이 없이 하루 종일 멍한 표정으로 TV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거나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잠만 잤다.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불안정하고 자꾸만 여자 병실 앞에서 서성거리며 당신의 방을 못 찾고 헤매는 일이 잦아졌다. 아버지를 모시고 안과검진을 받으러 갔을 때 양쪽 눈에 백내장이 심하다는 얘길 들었다.
한쪽 눈은 흐리게 형체를 분간할 정도의 시력이 남아있고 다른 쪽은 빛만 감지할 수 있을 정도로 시력이 손상되어있다고 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더니, 난 육안으로 백내장을 가려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어느 날 시아버님의 탁한 눈을 보고 백내장이 분명하다며 안과에 모시고 갔다가 백내장 수술을 해드린 경험이 있었기에...
시어머님의 눈도 그랬었다.
그러나 나의 아버지는 육안으로 봤을 때는 눈동자가 맑아 보였다.진작에 안과검진을 받았어야 했지만 아무리 설명을 해도 막무가내로 거부하는 아버지를 이겨낼 도리가 없었다. 어린애처럼 둘러업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입씨름하다 지쳐서 매번 포기하고 말았었다.
백내장 수술 전에 필요한 검사를 하고, 양쪽 눈을 다른 날짜에 수술하고, 정기검진을 매주마다 갔다. 당뇨가 심해서 눈의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수술도 쉽지 않았기에 남들보다 몇 배 더 자주 검사가 필요했다. 덕분에 병원 밖 바람도 쐬고 짜장면이나 돈가스도 사드리고 커피숍에서 함께 커피도 마셨다.
아버지를 안과에 모시고 다녔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니 면회가 일절 금지된 팬데믹 시절에 누린 호사였다.
안과 정기검진 다녀온 날 집앞 공원에서, 아버지가 키웠던 강아지와 함께
수술 후부터는 아버지의 낮잠이 없어지고 예전처럼 TV를 종일 봤다. 여전히 침대 아래로 내려오지는 않았지만 축 처진 모습이 아니라 늘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일에 치어 아버지와 얘기를 나눌 시간은 없었지만 간식을 챙겨드리고 저녁 근무가 끝나기 전에는 틀니를 씻어서 보관통에 넣어놓는 것이 아버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틀니관리는 간병사들이 하는 일이었으나 아버지는 절대 남에게 틀니를 빼서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먹고 자고 TV 보고 대소변 실수도 하고, 한 번씩 데스크로 나와서 간식을 달라고 하고, 날 볼 때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냐? 먹을 것은 없냐? "라고 무심히 말하던 아버지...
입원한 지 몇 달이 지나고 시력이 좋아진 후 섬망 증상은 사라졌다. 꾸준히 복용한 약도 물론 역할을 했을 것이다.
가끔 아버지에게 물어봤다, "지내시기 어떠세요?"라고.
"응, 좋다."라는 짧은 대답에 난 안도하며 죄책감을 조금씩 덜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평온한 모습으로 병원생활에 익숙해져 갔지만 난 끝없이 이어지는 병동 업무와 수간호사와의 불협화음으로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