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죽만 고집하셨던 아버지

아버지의 병원생활 3

by 엘 리브로

요양병원에서 지내는 환자들의 일상은 늘 똑같이 반복된다. 아침 기상 후 식사시간, 약 먹는 시간, 오전 간식 시간, 매주 1회 목욕하기, 점심 먹고 약 먹고 오후 간식 시간, 저녁 식사 후 약 먹고 취침. 그 외의 시간은 종일 TV 시청 아니면 잠을 잔다. 자다 깨다 하면서 TV를 보는 사람도 있고 종일 잠만 자는 사람과 종일 TV만 보는 사람들도 있다. 아버지는 처음 두 달 정도는 종일 잠만 잤고 식사 시간에만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안과에 모시고 다니면서부터는 깨어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백내장 수술 후에는 시력이 1.0 이상 나올 정도로 좋아져서 하루 종일 열심히 TV를 봤다.

"아부지, 그렇게 침대에 앉아 계시지만 말고 움직이세요. 병실 밖에 나가서 다른 분들이랑 말씀도 나누시고 TV도 여럿이 같이 보면 더 재밌잖아요?"

"됐다! 혼자 봐도 재밌기만 하다."

"친구분도 사귀셔야죠. 맨날 텔레비전만 보세요?"

"내가 뭔 텔레비만 본다냐? 산책도 하고 커피도 마시러 나가고 그러지."

말로는 아버지를 당할 수가 없다.

"알았어요. 그래도 같은 방 어르신들하고는 인사도 하고 지내시죠?"

"아니, 영감들 다 수준이 안 맞아서 할 말도 없고..."


그랬다. 아버지는 평생 동안 타인을 평가했다, 학벌이나 직업으로 혹은 외모로. 그래서 가족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고, 당신은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일정한 테두리 안의 사람들과만 교류했다. 노인이라는 단어도 싫어해서 노인정이나 노인 복지관 근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자극을 받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시도를 해봤다면 치매가 그렇게 빨리 오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요양병원에는 치매 환자들이 많았지만 알코올이나 약물중독으로 인한 치매가 아닌 노인성 치매 환자 중에서는 아버지가 가장 젊었다. 물론 나의 할머니도 증조할머니도 치매가 있으셨으니 유전적인 요인이 강했겠지만 본인의 노력으로 발병을 늦추거나 발병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환자들의 식사는 일반식, 일반 죽, 당뇨 일반식, 당뇨 죽, 미음, 깨죽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아버지는 처음에 약에 취해 음식 삼키는 것조차 힘들어해서 깨죽을 드렸었다.

문제는 하루 세끼 깨죽만 고집하게 됐다는 것이다. 밥을 드리면 아예 손도 안 대고 식판을 그대로 내놨다.

틀니에 의존하게 되면서부터 밥보다는 죽을 더 잘 드시고 좋아하기는 했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허구한 날 물이나 다름없는 훌렁한 깨죽을 주식으로 하는 걸 보며 내 마음은 타들어갔다.

다행히 입원 한 지 3개월쯤 지나자 혈당이 안정되어 간식이 허용되었고 난 부지런히 간식을 날랐다.

고구마, 빵, 샌드위치, 과일, 요구르트 등등... 오전 간식 시간에는 과일을 꼭 드시도록 밀폐용기에 몇 개씩 담아 내가 쉬는 날에도 드실 수 있게 했다.

간식을 드리고 나서 빈 그릇을 가지러 병실에 들어가면 "먹을 것 없냐?"가 아버지의 단골 멘트였다.

"좀 전에 드셨잖아요." 하면 "언제 뭘 먹었다는 거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빈 그릇, 아버지가 좀 전에 드신 거라고요." 하면 "그건 며칠 전에 먹고 놔둔 것이지! 내가 거짓말하겠냐?"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럴 땐 "알겠습니다~ 뭐 드실 것 갖다 드릴게요~~"라고 말하고 나오는 것이 상책이다. 어차피 아버지는 그런 대화를 한 것도, 본인이 간식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도 금방 잊으실 테니까...


간식을 따로 드시기는 했지만 절대 밥을 드시지 않으려는 아버지와 실랑이도 참 많이 했다. 아주 가끔은 주말 점심때 짜장면을 주문해 드리기도 했다. 환자들 중에 누군가가, 혹은 수간호사의 부탁으로 수간호사의 아버지를 위해 짜장면이나 탕수육을 주문할 때면 나도 아버지를 위해 짜장면과 탕수육을 주문했다.


환자들 중에는 잘 삼키지 못해서 옆에서 꼭 지켜봐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인지장애가 있는 환자들은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 음식이나 나눠주기 때문에 사식을 먹는 경우에는 특히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아버지는 반대로 절대로 남한테 음식을 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들의 몫을 따로 챙겨서 가지고 들어가야 했다.


요양병원에는 오랜 입원생활 동안 가족들에게 잊혔거나 외면당하고 있는 환자들이 많다.

간식비가 없어서 흔한 두유 간식 하나도 못 얻어먹고 환자식이의 식사만 하는 환자들에게 간호사실에 들어온 음료수나 퇴원하는 환자들이 두고 간 두유를 주기도 했다.

틀니가 아예 없거나 인지적인 문제로 음식을 거부해서 죽만 먹는 환자들도 꽤 많았다. 그렇게 아무런 반찬도 없이 하얀 쌀죽이나 미음만 먹는 환자들은 결국엔 전해질 불균형이 와서 따로 정맥주사를 통해 칼륨이나 나트륨을 공급해 줘야 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영양상태를 늘 걱정하는 나와는 달리 다른 직원들은 무사태평이었다. 하긴 입으로 먹을 수 있는 게 어딘가? 입으로 물 한 모금도 못 먹고 콧줄을 끼운 채 두유처럼 생긴 조제식만 공급받고 있는 환자들도 있는데 말이다. 아버지를 비롯해서 몇몇 치매환자들은 매 끼니 깨죽만 고집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어떻게 질리지도 않고 깨죽만 365일 하루 세끼를 먹을 수 있는지... 그래도 아버지는 나의 극성과 나를 의식한 다른 직원들의 배려로 밥반찬은 골고루 꼬박꼬박 챙겨 드셨다. 당뇨식인 잡곡밥을 안 드신다고 나는 늘 애가 탔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금방 소화되고 당 수치가 급격하게 오를 것이 뻔한 음식들을 원했다. 정상인들도 건강한 식습관을 갖고 유지하기 힘든데 치매 환자들에게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싶어 '그냥 드시고 싶은 것이라도 맘껏 드실 수 있으면 그게 복이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밥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하루에 두 번 오전 9시와 오후 1시, 아침과 점심 식사시간 이후에 커피타임이 있었다. 간호사실 데스크 아래의 선반에는 환자들의 이름이 쓰인 믹스커피 박스가 줄지어 있었는데 거동이 자유로운 어르신들이 자신의 컵을 데스크 위에 갖다 놓으면 직원들이 커피를 한 봉지씩 터서 부어주었다. 처음 근무를 시작했을 때 환자들에게 커피를 타 주면서 이름이 잘 외워졌다.

아버지는 평생 커피를 좋아했고 아메리카노를 즐겼는데 치매 증상이 있은 후부터는 하루 종일 물처럼 달고 살았다. 그러다가 입원하기 몇 달 전부터는 치매 증상이 심해지고 혈당이 치솟으면서 설탕물을 달고 살았었다.

종일 TV만 보면서 화장실 갈 때를 제외하고는 침상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아버지에게 열심히 부탁을 드렸다.

"식사 후에 커피 드시러 나오세요. 간호사실에서 커피 드려요."

"커피를 주문하면 갖다 줘야지, 내가 가지러 간다고? 됐다!"

"아이고, 아부지! 여기가 커피숍이 아니고 병원이라고요. 커피 좋아하시잖아요. 아버지 것도 커피 사다가 놔두었으니까 달라고 하세요."

"커피를 샀으면 나한테 줘야지 어디다 놨다고?"

"환자분들한테 커피를 드리면 수시로 드셔서 수면에 방해되고 커피 드시면 안 되는 분들, 입으로 드시면 안 되는 분들까지 나눠주는 환자들도 있어서 그래요. 규칙이라 어쩔 수 없으니 데스크로 가셔서 달라고 하시면 돼요."

"미안하게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한다냐, 내가 자판기에서 뽑아 먹으면 되지..."


병동에는 자판기가 없다. 아버지를 움직이게 하려고 몇 번이나 커피 얘기를 했지만 마이동풍이었다.

가끔은 일에 덜 쫓기고 나도 커피 한잔 마실 여유가 있을 때면 아버지에게도 커피를 타서 병실로 가져다 드렸다.



아버지를 병실 밖으로 나오게 하기 위한 나의 집착은 한동안 계속되었는데 바로 토요일 오전에 하는 노래방 시간이었다. 자유롭게 움직이는 환자들은 대부분 복도 중앙의 넓은 홀로 모여들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늘 정해져 있었지만 직접 부르지 않아도 박수를 치거나 춤사위를 보이며 그 시간을 즐겼다.

병실 밖에서 노래방 기계의 음악소리가 아무리 크게 울려도 이불 뒤집어쓰고 잠을 자는 환자들도 있었다.

아버지는 팔베개를 하고 천장을 보고 누운 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는데 음악소리를 자장가 삼아 오전 잠을 주무시는 건지 마음속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음악을 좋아하고 기타 치며 노래하는 것도 즐겼던 아버지는 병원에 계시는 동안 단 한 번도 마이크를 잡지 않았다. 그냥 남들 노래하는 것이라도 보시라며 억지로 손을 잡아끌어도 거절할 때가 많았다.

아버지가 노래방 시간에 밖에 나와 다소곳이 두 손을 포개어 꼬은 다리 위에 얹고 앉아 계실 때 그 손을 잡고 일으켜 마이크를 건네줄걸 그랬다. 몇 번 안 되는 그 기회를 그냥 흘러 보내고 말았다는 걸 후회한다.


토요일 이른 아침에 출근할 때면 '오늘은 꼭 아버지랑 노래를 불러야지!'라고 생각하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고등학생 시절에 아버지랑 자주 불렀던 [저 구름 흘러가는 곳], [하숙생], 팝송 중에 [IOU]나 [Top of the World] 같은 노래들을 참 많이도 불렀다, 병원으로 가는 도로 위에서 운전을 하면서...

무엇이 발목을 잡아서 아버지와 함께 노래하는 걸 머뭇거렸는가...

나는 두려웠다. 많은 환자들과 직원들이 보고 있는데서 노래 부르는 것이 어려운 건 아니었다. 몇 소절 부르다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 용기를 내지 못했다.

가족 앞에서도 울지 못하고 참는 나라서 그랬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마음껏 소리 내어 울지 못한 나였다.

운전대를 잡고서 혼자 있는 공간에서만 소리 내어 울었다. 아니 그때조차도 끄윽끄윽 소리를 참아냈다.

아버지의 주검을 보고서도 그랬다. 아버지가 슬퍼할까 봐 울음을 삼켰다. 청각이 가장 늦게까지 남아있는다고 하는데 나의 통곡을 아버지가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아버지를 담담하게 떠올릴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버지가 떠난 지 4개월이 훌쩍 지났고 그동안 내 마음은 평온했다. 그러나 그리움은 갑자기 휘몰아치기도 하는가 보다. 아버지의 얼굴 표정, 목소리, 몸짓 하나하나가 떠오르고 당장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오열했던 지난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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