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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 리브로 Sep 27. 2022

2m 반경의 삶과 2㎡의 삶

어딘가 닮아 있는 그들의 삶

지난여름의 초입에 새로 이사 온 오피스텔의 주방 싱크대 쪽에 가로로 길게 난 작은 유리창이 있다.

오피스텔이라 베란다 공간이 없어서 좁아진 집을 그나마 답답하게 느끼지 않게 해주는 고마운 창문이다.

작은 창 너머로 보이는 저수지와 그 넘어 숲의 풍경은 마치 나의 잘 못 된 선택에 대한 위로인 듯하다.

그 창 밖으로 보이는 저수지 아래의 밭과 기와지붕 덮인 집들의 풍경 가운데 고물상이 하나 있다.

고물상은 천막으로  뒤덮인 구조물이 구석에 있고  양철판으로 담이 둘러져 있다. 담장 안쪽으로 출입문 바로 옆에는  백구 두 마리가 묶여 있다. 오피스텔의 지하 주차장 입구에 바짝 붙어있는 그 고물상 앞을 지나치면서 또는 싱크대의 창문 너머로 보인.  백구 두 마리는 쇠사슬 줄에 묶여 있는데 종일 담장 안에 있는 것이 답답한지 바닥에서 20센티쯤 위로 붙어있는 출입문 아래로 기어 나와 땅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오가는 차들을 무심히 바라보거나 잠을 자는 것이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있지만 비가 오지 않는 날은 늘 그렇게 밖에 나와 있다.


내가 강아지들을 산책시키면서 그 앞을 지나게 되자 두 마리의 개들이 맹렬히 짖었고 우리 집 강아지들도 그에 질세라 짖어대는 통에 얼른 자리를 뜨고 말았다.

두 마리의 백구는 어쩌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가까이 접근할 때 짖는 것 말고는 거의 엎드려 잠을 잤는데 간헐적으로 몇 번씩 컹컹 짖을 때가  있었다. 고물상 안팎으로 고철들을 실은 트럭이 드나들 때면 꼬리를 치며 작업자와 차를 향해 팔짝팔짝 뛰면서 말이다. 제게 밥을 주는 주인을 보고 반기며 "저 한 번만 봐주세요!" 하듯이 애절하게 짖어대는 두 녀석의 우렁찬 목소리에 새벽잠이 깨기도 한다. 


그 덩치 큰 강아지들을 보면서 2m의 줄로 닿을 수 있는 거리가 세상의 전부인 그들의 삶을 애처로이 바라보고 있는 나. 그들의 눈앞에는 풀과 나무와 하늘의 풍경이 펼쳐져 있으나 더 멀리 가 볼 수도 마음껏 뛰놀 수도 없다.

 그 들을 볼 때마다 말한다, "할 수만 있다면 매일 저 애들 데리고 산책 한 번씩 해주면 좋겠어..."라고. 그렇다고 남의 사업장 문을 두드리고 들어가 "저희가 이 집 개들을 산책시켜도 될까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낯 선 사람들에 대한 경계가 심한 개들. 어린 시절부터 묶여 있었고 사람들과 교류도 없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사람들과 친화적으로 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부인으로부터 사업장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에 놓여 있을 터. 그것이 그들 견생의 사명인 것을 어쩌겠는가?


창밖으로 보이는  고물상과 백구 한 마리


요양병원에 입원해서 생활하는 많은 노인 환자들은 거동이 불편하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환자들,  이동할 수 있으나 질병으로 인해 쇠약해지고 의욕이 없어서 안 움직이려고 하는 환자들, 거동이 자유롭고 특별한 질환이 없더라도 인지장애로 인해 배회하다가 길을 잃을 수 있는 환자들이 대부분이다.

환자들 중 대부분은 행동반경이 자신의 침대 주변을 벗어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침대를 벗어날 수 없는 와상 환자들이야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선택적으로 자신의 세계를 길이 2m, 폭 1m의 침대로 제한해 버린 사람들도 많다. 나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병으로 인해, 운동 부족으로 인해 근력이 떨어지자 아예 자리에서 일어서기를 포기해 버린 많은 환자들을 보며 너무나 안타까웠으나 현실은 그들의 운동을 도울만한 인력이 없다. 재활전문병원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하루에 두 번 정해진 시간에 한 시간씩 운동치료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원한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치료가 아니었다. 보험수가를 적용받을 수 있는 특정 질환자들에게 정해진 기간 동안만 해당하는 것이다.


식사를 한 후에 배식판을 지정된 장소에 가져다 놓거나 화장실에 가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침대에서만 보내는 사람들과 기저귀를 착용하고 침상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면서 단 한 발짝도 침대 아래로 내려놓지 않는 사람들이 요양병원에 가득하다.

어떤 환자들은 불안정한 보행 때문에 낙상의 경험이 있어서 더 큰 부상을 방지하기 위해 침대 밖으로 못 나가게 하기도 하는데 환자의 저항이 심할 때는 가족의 동의를 얻어서 억제대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런 환자들과 간호인력은 하루 종일 씨름하는 것이 일상이다. 억제대를 풀어달라고 소리 지르고 침대 위에서 온몸으로 저항을 하고 교묘히 손과 발을 이용해서 억제대를 풀고 나왔다가 넘어져서 멍이 들기도 한다. 심한 경우 골절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 책임을 병원에서 져야 하고 노령의 환자에게는  와상으로 인한 많은 합병증을 가져올 수 있는 큰 사고이다 보니 낙상 방지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병원 일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 한 두 달은 환자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파 눈시울을 붉혔고 퇴근길 운전하는 차 안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감정적으로 동요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들을 위해 운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그들에게 최선인 것을 행하고 때로는 차선을 선택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최악을 피하거나 차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자주 했었던 나의 질문, "아빠, 지내시기 어떠세요?"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어, 좋다. 지낼만하다."

아버지는 조용한 병실과 창밖의 하늘과 종일 TV를 보면서 지낼 수 있는 그 시간을 마음껏 누리고 계셨던 것 같다. 마음껏 바깥세상에서 돌아다닐 수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은 내 중심적인 생각이었을 뿐.

외진을 위해 병원 밖으로 모시고 나간 김에 조금이라도 더 바깥바람을 쐬어드리고 싶어도 "어서 숙소에 가서 쉬고 싶다."라고 하시던 아버지였다.


이웃에 묶여있는 개들을 보다가 갑자기 요양병원을 떠올린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입원해 계셨던 요양병원으로 출근하던 길목에 작은 공장이나 창고 같은 건물들이 있었고 묶여있는 커다란 개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개들을 보면 눈물이 났고 환자들을 보면 또 눈물이 났다.

그러나 한편으론, 자신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순응하며 잘 지내고 있는 환자들을 나의 감상에 젖어 동정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찬가지로, 묶여 지내는 개들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 마당 한 구석에 묶여 짧은 견생을 살아야 했던 개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괴로워했던 시간들도 과거와 현재의 개들의 삶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컹컹 짖어대는 고물상의 개들에게 내가 만약 "얘들아, 너희들 이렇게 묶여 사는 거 괜찮아?"라고 묻는다면 그들은 뭐라고 대답할까?

"어, 괜찮아. 확 트인 풍경도 감상할 수 있고 하루에 두어 번 주인아저씨 얼굴도 보고 여기 누워서 오가는 자동차랑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구. 누가 맛난 거나 좀 가끔 갖다 주면 금상첨화겠네."라고 대답 하지나  않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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