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의 슬픔

동생을 잃는다는 것은...

by 엘 리브로

단풍이 아름답게 물든 무등산.

오색보다 더 찬란한 빛깔로 가을을 물들이고 있는 나뭇잎들 사이로 햇빛이 반짝인다.


지난주에 심폐소생술 교육을 받기 위해 시에서 운영하는 교육원에 갈 일이 있었다. 예상보다 교육이 일찍 끝나서 갑자기 생긴 여유시간, 그냥 집으로 들어가기엔 가을 하늘과 가로수의 단풍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일에 치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증심사 산책로가 마침 교육원 근처였다는 걸 알고 그쪽으로 차를 돌렸다. 공원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한적한 도로의 가로수만 봐도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고 무등산 국립공원의 주차장 입구에서부터 그리움과 슬픔이 차올라 눈앞이 흐려졌다.

아버지와 함께 왔던 곳, 함께 걸었던 길...


아버지는 알츠하이머 환자가 되기 전까지만 해도 매주마다 등산을 하셨다. 철마다 이름난 산을 찾아다녔고 무등산 곳곳을, 지리산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니셨다. 기름값을 아껴야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그 횟수와 이동반경이 차츰 짧아지더니 나중엔 아버지의 집에서 가까운 등산로를 이용해 자주 무등산에 올랐다.

그러나 치매의 증상이 심해지면서 등산을 그만두고 주로 유원지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었다. 요양병원에 입원하기 1년 전부터는 급격하게 쇠약해지셨고 등산은 고사하고 집 앞 포장도로에서 걷는 것도 힘들어하셨다. 그래도 가끔은 내 성화에 못 이겨서 무등 산장이나 증심사 쪽으로 나들이를 나서곤 했는데 차에서 내려 주차장에서부터 10분만 걸어도 벤치에 앉아 쉬었고 "더 이상 걷기 힘들다, 어서 차 타고 집에 가자"며 발걸음을 돌리시곤 했다.


증심사 입구의 전통문화관 담벼락에 설치된 구조물. 잠자리 잡는 아이들의 모습이 정겹다.


요양병원에 들어가시기 몇 달 전이었다. 꼼짝없이 누워 TV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아버지는 증심사로 나들이 가자는 나의 말에 "다음에, 오늘은 컨디션이 나빠서, 그냥 나가기 싫어서" 등등의 이유를 대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으나 결국엔 나와 함께 집을 나섰다. 점심때 맛난 걸 사드리겠다는 말에 "그냥 짜장면이나 배달시켜 먹자." 하시는 걸, 안된다고 했더니 마지못해 몸을 일으킨 것이다.

그날 나의 파란색 백팩을 보고 멋지다며 갖고 싶다고 되풀이해서 말하던 아버지에게 나는 "다음에 드릴게요."라고 말했다. 마음속으로는 '집에 가방도 많구만, 외출도 안 하시면서, 오늘 지나면 어차피 기억도 못 하실 텐데...'라고 생각하면서...


공원 주차장에서 나와 등산로 방향으로 가다 보면 등산용품과 의류를 파는 가게와 식당들이 즐비하다. 느릿느릿 등산용 스틱으로 땅바닥을 치며 걷던 아버지는 가게의 진열대마다 멈추어 서서 옷이며 신발을 만져보고 모자를 써보고 스틱을 고르느라 좀처럼 산책다운 산책을 할 수가 없었다. 걸음을 재촉하는 나와 물건들에 정신이 팔린 아버지 사이에 같은 패턴의 대화가 반복됐다. "어서 가요, 아빠! 이따 내려오는 길에 구경하시게요~~" "뭘 그렇게 재촉하고 그러냐? 구경 좀 하면서 천천히 가지." "그것 좀 내려놓으세요, 아빠. 그거랑 비슷한 점퍼가 집에 몇 벌이나 있던데..." "뭔 소리냐? 이런 색깔은 하나도 없는데... 반값 세일한다잖아!" "스틱이 집에 여러 개 있잖아요, 잘 쓰지도 않으시면서..." "이건 내 것보다 가볍고 좋구만. 날마다 산책할 때 필요하지, 왜 안 써?" "등산용 배낭도 집에 많은데 또 사시려고요?" "가볍고 색깔도 이쁘구만, 이렇게 생긴 것은 집에 없어!"

"에휴... 그럼 이따 내려가는 길에 사드릴게요."

줄지어 선 상가의 끄트머리까지 걸어가자 이제야 증심사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시작되는데 아버지는 몇 미터 못 가서 피곤하다며 내려가자고 하셨다. 점심으로 콩국수가 드시고 싶다고 해서 들어간 식당에서 마치 콩국수를 처음 드시는 듯 너무나 맛나게 드셨다. 가게 주인은 온갖 미사여구를 써가며 자기 가게만의 비법을 설명했으나 사실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맛이었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경사길을 내려가는 내내 아버지는 피곤한지 아무 말도 없으셨고 등산용품 같은 것은 이미 다 잊어버린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앞만 보고 걸으셨다. 스틱으로 바닥을 콕콕 두드리면서...


그 무렵 아버지는 산책은 고사하고 문밖출입도 거의 안 하셨다. 때로는 주말에 방문한 나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도저히 설득이 안 될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종일 거실 바닥에 누워 지내시며 화장실과 주방 식탁까지 걷는 것이 움직임의 전부였다.

넓은 공원 주차장에서부터 걸었던 거리가 당시 아버지의 체력에는 꽤나 긴 거리였을 것이다.




마주 보고 늘어선 상가 사이의 비탈길을 혼자 오르는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버지와 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날 뭐든 아버지가 갖고 싶어 했던 것 중에 하나라도 사드릴걸...', '파란색 가방을 그냥 드릴걸...' 하는 생각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런저런 다른 기억들을 애써 끄집어내던 중에 큰고모가 생각났다.

큰고모는 아버지의 네 살 위인 누나이다. 작고 가냘픈 몸에 어디서 기운이 나는지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등산을 자주 하셨다. 가끔 아버지와 동행하거나 각자 지인들과 산에 올랐다가 우연히 마주치면 커피숍에서 차 한잔씩 나누기도 했다는 말도 들은 기억이 났다. 문득, '고모는 지금 뭘 하고 계실까? 이렇게 날씨 좋은 날, 산에 오르거나 내려오는 중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에 전화를 걸었다.


"끄응... 진아, 네가 웬일이냐?"

"고모, 어디 편찮으세요? 왜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으시고..."

"내가 아직도 네 아빠를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진다..."

그랬다. 고모는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자 비틀거렸고 절을 하고 나서는 일어나지 못하고 쓰러지셔서 내가 간신히 일으켜 부축을 했었다. 8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그때의 감정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시는 듯했다.


"OO, 이 나쁜 놈! 네가 제일 나쁜 놈이다, 이놈!!"하고 조카인 나의 남동생을 향해 분노의 눈길과 송곳 같은 말들을 쏟아냈던 고모였다. 자식들이 셋인데 아무도 아버지를 모시지 않고 요양병원에 입원시킨 것을 늘 한탄했던 고모는 우리 3남매에게 원망이 컸을 것이다. 아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신 듯 고모는 남동생을 보자마자 다른 친척들이 보는 앞에서 모진 말들을 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상태로 간신히 고모부에게 기댄 채 잠시 앉아있다가 나가신 고모는 다음날 발인 때는 참석하지 않으셨다.

그때 이후로 등산을 거의 못하고 있으며 친구들 모임에서는 나의 아버지와 함께 갔던 식당에서 쓰러졌다고도 했다. 아직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고모가 안타깝다. 우울증 약을 처방받았는데 잘 안 먹게 된다고도 했다.


사실 나와 남편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코로나로 인한 사망이라고 해서 아버지는 장례식장으로 바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병원에서 밀봉되어 특수 장의업체로 바로 실려나갔으며 그곳에서 입관까지 마친 상태로 다음날 장례식장으로 모셔졌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코로나19의 유행상황에 따라 병원에서의 면회가 허락이 되었다가 다시 금지가 되기를 반복했다. 외부에서 간식을 넣어주는 것이 가능했다가 그 병원에서 집단감염 사태가 발생하자 모든 외부 음식들의 반입이 금지되기도 했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궁중 삼계탕을 한 번 더 넣어줄 것을 다음으로 미룬 것이 너무나 후회된다던 삼촌의 충혈된 눈을 잊을 수가 없다.


고모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상하다 정말... 나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었는데 네 아빠는 왜 이렇게 극복이 안되는지..."

"부모는 나보다 먼저 가실 것을 예상할 수 있으니까요... 형제자매는 다를 것 같긴 해요... 저도 힘들었지만 아빠에 대해서 글을 쓰고 브런치에 올린 것이 많이 도움이 됐어요."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그런가 보더라만 난 그런 거 좋게 안보이더라."

역시 큰고모답다. 할 말은 하신다.

"고모 우울증 약 드셔야 돼요. 억지로라도 친구분들 만나서 얘기 많이 나누시고요. 언제 저랑 아버지한테 같이 가시게요"

"아직 네 아빠한테는 못 가겠다. 그 집 앞 근처에, 유원지 쪽으로도 못 지나가겠고. 담에 연락하자..."라며 고모는 전화를 끊으셨다.


증심사 입구의 전통문화관 담벼락에 설치된 구조물. 추수하는 농부들의 모습과 가을 햇살이 잘 어우러진다.




아버지를 잃은 나의 슬픔과 동생을 잃은 고모의 슬픔 중 어느 것이 더 크고 깊다고 할 수 있을까? 슬픔의 종류가 있다면 우리의 슬픔은 서로 다른 것일까? 큰고모의 슬픔을 다 헤아릴 수는 없다,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25년 동안 친정에 발길을 끊었던 고모였다. 할머니의 사업이 망한 것을 큰고모 탓이었다고 믿고 있는 삼촌과 작은고모와 달리 아버지는 평생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으셨다. 그런 고모집에 아버지는 명절이면 내 손을 잡고 방문하는 것을 한 해도 거르지 않았었고 내가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아버지 혼자서 명절 인사를 가셨다.

무뚝뚝한 고모부와 달리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고 영화와 음악을 좋아하고 여러 가지 악기 연주와 노래, 운동도 잘했었다는 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고모는 우리 집에 가끔 놀러 오시기도 하고 할머니의 제삿날이면 늘 참석했다. 팔방미인 남동생이 다정다감하기까지 하다며 아버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 고모를 대할 때마다 엄마의 속은 아마 부글부글 끓고 있었으리라... 아버지를 나의 아버지가 아닌 한 여자의 남편으로 봤을 때 고모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으니 말이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모두가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돌아가신 엄마는 물론이고 나와 동생들, 고모들과 삼촌, 아버지의 직장 동료나 동창들까지도...

각자는 다른 방식으로 아버지를 회상하며 제 각기 추억하는 것들과 후회하는 장면들이 있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애도하고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슬픔의 늪에서 벗어날 것이다. 누군가는 쉽게 잊을 것이고 누구는 오랫동안 반복해서 생각하며 지나가버린 일들을 후회하고 아파하겠지.


아버지에게 더 해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미루다가 못 하고 만 모든 행위와 말들은 가슴을 짓눌렀고 때로는 찢어질 듯 아프기도 했으나 나는 그 소용돌이 속에서 빠져나오기로 했다.

글을 쓰면서 아버지를 떠올릴 때면 내가 못 한 것이 아닌 내가 아버지를 위해서 했던 일들에 집중할 수가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한 시간들을 떠올리는 것이 아버지에게 닿을 수 없었던 시간들을 원통해하는 것보다 나았다. 내가 숨 쉬고 살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 글쓰기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를 볼 수 없었던 몇 개월의 시간을 생각하는 것이 힘들다. 어서 아버지에게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다른 환자들을 내버려 두고, 간호사가 부족한 병동에서 업무가 마비될 상황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감염예방을 위해 보다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지는 병원으로 아버지의 거처를 옮겼더라면 상황이 달랐을 거라는 자책도 가끔 내 안에서 고개를 내밀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지 않은 길이므로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반복해서 나를 책망하며 괴로워하는 것을 아버지가 원하지는 않으실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달래 본다.



허우적거릴수록 더 깊이 빠져드는 늪과 같은 슬픔에서 고모가 어서 빠져나오시기를 나는 바란다.

고모와 함께 무등산에 오르고, 내려오는 길에는 산자락이 창밖으로 내다 보이는 카페에 앉아 도란도란 아버지 얘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오기는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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