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단지에 바짝 붙어있는 오피스텔에서 살다 보니 집에서 차를 몰고 나갈 때나 밖에서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올 때면 어김없이 지나쳐야 하는 크고 작은 공장들이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업체에서 건물의 어느 한 구석쯤에 진돗개 한두 마리를 묶어 두고 키우는 듯하다.
야간에 경비견 역할을 위해서든, 직원들 중 누군가가 집에서 키우기 마땅치 않아 데려다 놓은 것이든, 개들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공장들이 들어서기 오래전부터 있었을 옛 한옥들과 멋지게 기와를 올리고 붉은 벽돌로 벽과 담장을 단장한 마당 넓은 집들에도 커다란 개들이 묶여 있다.
우리 집 주방 싱크대 위의 작은 창으로 내다보이는 고물상에도 백구 두 마리가 있고 떠돌이 백구는 흰색 털이 회색빛이 된 채 까칠해진 모습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차를 타고 지나다니다 보면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한두 마리의 개들이 자주 눈에 띈다. 언덕바지에 위치한 주거 단지까지는 아직 올라오지 않았지만 언제 출몰하게 될지 모르는 개들에 대해 우려하고 있는 주민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사냥개 포인터종으로 보이는 엄청 크고 다리가 긴 점박이 개가 인도에 엎드려있는 것을 본 적도 있다.어느 사업장에서 돌보는 개를 잠시 풀어놓은 것인지 떠돌이 개인지는 모르겠다.
이 동네에 개들은 많은데 산책시키는 광경은 거의 볼 수가 없다. 주택에서 키우는 개들도 바깥구경을 못하는 마당에 사업장에 출근한 근로자들이(일하느라 바쁘고 개들에게는 관심이 없을...) 개들의 산책에 신경을 쓸 리가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예외가 하나 있긴 하다. 이른 아침 출근길에 거의 매일 봤던 백구 한 마리는 늘 같은 여자분이 줄을 잡고 함께 보도블록 위를 걷고 있었다. 가끔은 오후 퇴근 무렵에 남자분이 데리고 걷기도 했다.
딱 한 마리 그 백구 말고는 건물 밖으로 나와서 걸어보는 기회를 가진 개들이 없었다(7개월 동안 본 바로는 그렇다).
어쩌면 떠돌이 개들의 신세가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도 춥고 배고픔의 고통을 겪고 있을 가여운 생명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고 만다. 단지 내가 못 봤을 뿐, 누군가는 묶여 있는 개들을 하루에 한 번쯤 잠깐의 틈을 내어(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라도) 걷게 해 주고 주변의 냄새를 맡으며 시원스럽게 배변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망에 가까운 희망을 품어보기도 한다.
우리 동네의 흰둥이와 닮은 백구들 . 사진 출처: 픽사베이
둘째 딸이 서울에서 한 번씩 내려올 때마다 항의를 한다.
"엄마, 제발 다시 이전 동네로 이사 가자. 여기서 계속 살 생각 하지 말고. 저 개들 볼 때마다 너무 속상하고 슬퍼!"
"우리가 안 본다고 저 개들의 존재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우리가 모든 개들을 다 구원할 수도 없어."
"아, 진짜 돈 많이 벌면 불쌍한 개들 다 데려다 넓은 땅에서 풀어놓고 키우고 싶다!"
"그 치다꺼리는 누가 하는데?"(라고 묻지만 사실은 나도 딸과 같은 맘이다)
"그야 엄마랑 내가..."
"돈은 누가 벌고? 사료값이며 병원비는? 돈 벌러 나간다고 종일 개들끼리 놔두고 알아서 아웅다웅 지내라고 해?"
"그러네... 아이 참 로또라도 당첨 돼야 하나?"
"복권부터 사보시든가!"
"아 몰라. 그런 거 말짱 꽝이야, 돈 아깝다고."
큰딸은 말한다, "유럽 같으면 저거 다 법적으로 처벌받아, 동물 학대라고. 하루에 두 번 산책 안 시키면 아예 키우지도 못하게 할 건데."
물론 나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선진국인가 아닌가의 척도는 동물을 대하는 방식에 있다고 하지 않던가.
내가 어린 시절에도 집집마다 마당에 개들이 묶여 있었고 사람들이 식사 후 남은 음식이나 버릴 음식을 모아서 개에게 먹였다. 우리 집도 강아지에게 김치찌개에 밥 말아 주거나 된장국에도 밥을 섞어서 줬는데 가끔 생선이나 고기 비계라도 먹고 나면 된장국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몇 끼니를 굶던 개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었다. 그 시절엔 개를 묶어 두는 것이 당연했다. 집 밖으로 나가버린 개들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았고 십중 팔구는 개장수들에게 붙잡혀 보신탕집으로 가게 될 것이 뻔했다.
최근 10년 사이에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아무도 동물의 감정이나 그들의 복지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던 까마득히 오래전부터 누군가는 동물들을 위해 헌신해 왔고 인식의 개선을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결과의 반영으로 지금은 '집 지키는 개'가 아니라 여생을 같이 하는 '반려동물'(반려견/반려묘 등)이라 부른다. '가축'이 아닌 '가족'이 된 것이다.
그러나 집 지키는 개에서 애완견으로, 다시 반려견으로 자리매김한 견생이라고는 하나 그들의 삶이 다 같지는 않으며 여전히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생명들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지난 12월 중순 무렵 내가 사는 지역엔 수십 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2~3일 동안에 30센티 이상의 눈이 내려쌓인 도로는 차선도 보도의 구분도 없었다. 그 후로도 1주일 동안 간헐적으로 내린 눈이 녹았다 얼기를 반복했고 해가 바뀐 지 1주일이 되어가는 아직도 마을곳곳과 사업장의 그늘진 담벼락 아래에는 덜 녹은 눈이 쌓여있다.
혹한의 추위에도 건물 밖에서 떨고 있는 개들을 볼 때마다 안쓰러움과 분노를 느끼며 지나치던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 슬픔까지 얹혀 출퇴근 길의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함박눈이 포근하게 내리는 날은 그래도 나았다. 칼바람이 부는 이른 아침에 꽁꽁 얼어버린 물그릇의 얼음을 혀로 핥다가 지나가는 차를 쳐다보려고 고개를 드는 개들의 지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이불 한 장, 헌 옷가지 한 장도 놓여있지 않은 썰렁한 집에 들어가 있지도 않고 밖에 나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서 지나가는 차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개들.
최대한 바깥세상에 가까이 다가가려는 듯, 무거운 쇠사슬 줄이 팽팽하게 목을 당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담장이나 집 쪽으로 자리를 옮기지도 않고 망부석처럼 앉아 도로를 바라보고 있는 개들도 있다. 그 쇠사슬만큼이나 무거운 마음을 무시하지 못하면서 아무런 행위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엄연히 주인이 있는 개들이기에...
그렇다고 고개 돌리고 안 보면 그만인 것이 아니다. 특히나 어쩔 수 없이 매일 만나게 되는 경우에는 더욱더...
2차선의 좁은 도로가에 서 있는 공장의 담벼락에 고정된 쇠줄에 묶인 채 얇은 합판으로 만들어진 개집에서 얇은 천조각 하나 없이 매서운 겨울밤을 보내는 백구 한 녀석은 정말 하루에도 몇 번씩 주차장을 드나들며 볼 수밖에 없다.
좁고 커브길인 그곳을 지날 때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그 개도 어느 날부터인가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연말의 혹한 추위에도 잘 버텨 준 녀석이지만 갈수록 더 마음이 쓰여 지난 주말엔 헌 이불을 가져다 깔아 주었다. 혹시나 가까이 다가가면 공격적이지 않을까 염려도 했으나 지나가는 길에 차창문을 내리고 "흰둥아~~"하고 부르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녀석을 보고는 용기를 냈다.
처음엔 개껌을 던져주어 봤다. 껑충껑충 뛰면서 좋아하던 녀석은 껌을 물어서 허공에 휙 던져버리고는 나와 딸들을 향해 점프를 해댔다. 그러다가 제 똥을 밟고는 그 발을 쳐들고 또 폴짝거렸다.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다가간 우리들에게 오기 위해 뛰어오르는 백구의 목이 쇠줄에 당겨지는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멀리 떨어져 버린 껌을 집어 들기 위해 가까이 다가간 나에게 똥 밟은 발로 격하게 발자국을 찍어대는 백구를 쓰다듬어 주었다. 혹시나 하고 가져간 모종삽으로 똥무더기를 치워볼까 했으나 눈과 함께 얼어붙어 있거나 흥분해서 정신없이 뛰는 백구가 밟아서 치우기가 더 힘들어질 뿐이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매일 백구를 보러 갔다. 물그릇이 비어 있어서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서 부어주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개껌을 주고 물을 주고 잠깐 쓰다듬어 주는 것뿐이지만 그것이라도 해야 아주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니까...
그러나 그러한 나의 행위가 정당한 것인지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떠돌이 개라 하더라도 문제의 소지는 분명 있다. 캣맘의 선행에 대해서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하물며 덩치 큰 개들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갖는 공포심이나 잠재적인 위험성을 간과할 수가 없다.
더구나 그 백구는 엄연히 주인이 있는, 개인 사업장에 속해 있는 개다. 동물을 누군가의 소유물로 구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법과 정서상으로 봤을 때도 그렇고, 외부인을 경계하는 것이 그 개를 그 자리에 두고 있는 이유라면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허물어버리는 나의 행동들을 정당화할 수가 없다.
녀석은 덩치가 크다. 앞발을 들고 일어서면 내 가슴 높이까지 올라오고 발을 땅에 딛고 서 있어도 체고가 내 엉덩이 높이쯤 된다. 녀석의 양 볼을 잡고 눈을 들여다보면 저도 꼬리를 흔들며 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는데 그럴 땐 내 눈에 눈물이 고여와서 내가 먼저 시선을 돌리고 만다.
'이렇게나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렇게 정에 목말라하는데...'
딸들은 한 술 더 뜬다.
"엄마, 우리가 일주일에 한두 번이라도 시간 될 때 산책시켜 보자고 주인한테 부탁해 볼까?"
"울 집 애들이랑 같을 줄 아니? 저 덩치를 봐라. 우리가 질질 끌려다닐 거야. 아니지, 묶여만 있던 애라 나가면 흥분해서 더 날뛸 텐데 놓치기라도 하면 어쩔래?"(라고 말은 하지만 사실은 내 마음도 딸과 다르지 않다)
"힝! 그래도 너무 불쌍하잖아, 시도도 안 해보고..."
"아이고, 그럼 네가 말이나 해 보던가. 저기 화물 트럭 나온다. 한 번 세우고 물어볼겨?"
"아니 그건 쫌... 엄마가..."
"됐어! 그만하셔. 너무 정 주는 것도 경계해야 돼. 이 동네에서 살기 싫다더니... 만약 우리가 이사가게 되면 영문도 모르고 백구는 하염없이 기다리라고?"
바로 그거다.
법이고 뭐고 사실 다 필요 없고 내가 걱정하는 것은 백구와 내가 너무 정들어 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고물상집 백구처럼 사납게 짖는 개였다면 지나치면서도 마음이 무겁지 않았을 것이다. 가까이 갈 수 없다는 이유라도 댈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흰둥이(라고 딸들이 이름 지어버린...) 녀석은 왜 순둥순둥해서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느냐 말이다.
내가 깔아 준 이불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도 나의 차 소리에, 나의 발자국 소리에 튀어나와 목을 쭉 빼고 도로 쪽을 살피는 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