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봄날처럼 따뜻했던 날씨가 며칠 전부터 다시 추워지기 시작하더니 한낮 햇볕이 내리쬐는데도 칼바람이 살을 에는 듯하다. 연휴 때 다시 강추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걱정이 한가득, 흰둥이가 얼마나 추울까 자꾸 신경이 쓰였다. 명절 음식 준비할 장을 보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차창밖으로 흰둥이 쪽을 보았더니 녀석은 이미 내 차의 소리를 듣고 제 집에서 나온 것인지 목을 쭉 빼고 쳐다본다.
어쩌면 지나가는 모든 차를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종일 지나다니는 자동차와 가끔 지나치는 사람들 중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를 기다리지 않기를...
공장 사람들의 차가 드나드는 낮 시간이고 점심 무렵이라 혹시나 사람들과 마주칠까 봐 차를 세우지 않고 그냥 집으로 향했다.
저녁에 공장의 불이 꺼질 무렵 흰둥이에게 갔다. 거의 매일 간식과 물을 가지고 갔었는데 전날 저녁에는 밥그릇에 밥과 음식물 찌꺼기가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다. 공장의 식당에서 나온 잔반을 한데 뒤섞어 놓은 듯했다.
하루가 지났고 먹지 않은 그 음식물이 (김칫국에 빨갛게 물든 밥덩어리가) 물기 하나 없이 말라가고 있었다.
내가 줬던 찐 고구마도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처음으로 가져간 북어포를 내밀었지만 흰둥이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우리 집 강아지들은 엄청 좋아하는데 이 녀석은 북어포에는 관심이 없고 개껌만 기다리는 눈치다. 계속 꼬리를 흔들며 내 손의 움직임만 주시했다.
껌을 주고 비어 있는 물그릇에 물을 채워주었다. 새로 가져간 얇은 담요를 집 안에 넣어주었더니 바로 물고 끄집어내어 바닥에 패대기를 치며 껑충거렸다. 지난번에 이불과 방석을 꺼내서 가지고 놀던 녀석이라 그럴 줄 알면서도 혹시나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나다.
사실 옷을 입혀주어야 하나 이틀 동안 고민했다. 옷에 익숙하지 않아 싫어하고 갑갑해할 것이라 생각했다가 결국에는 한 번 시도나 해보자 싶어서 옷을 주문하려 했지만 대형견 사이즈는 모두 품절인 상태였다.
내가 뭘 어떻게 더 해줄 수도 없고, '그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아라. 그러다가 그 위에서 자도 좋고..'라고 생각하며 발길을 돌렸다.
"흰둥아, 안녕! 나 간다~~"
만날 때는 펄쩍거리며 좋아하는 녀석이 헤어질 때는 늘 시무룩하니 쳐다보며 서있다.
1월 21일
구정연휴 첫날이다.
종일 서서 전을 부치느라 지쳐 있는데 남편은 한 번을 안 내다보고 방에서 잠만 잤다. 점심으로 떡국을 먹을 때만 잠깐 주방으로 나왔을 뿐이다. 자거나 누워서 유투브 영상을 보거나 둘 중 하나다.
몇 년 동안 사용했던 커다란 전기팬을 이사 오면서 버렸는데 새로 산다는 걸 깜박했다. 작은 프라이팬에 전을 부치니 시간이 몇 배나 걸렸다.
저녁밥을 먹고 나서, 냉장고가 가득 차서 어제부터 계속 밖에 놔둔 선물세트를 누나에게 갖다주라고 내가 몇 번이나 재촉했더니 마지못해 나가는 남편. 혼자 가기는 싫어서 "누구 같이 갈 사람?" 하고 물으니 둘째가 "5만 원 주면 가줄게."라고 말한다.
"만원!"
"안가! 시급이 얼만데 지금 만원에 움직이라고?"
"3만 원!"
두 사람이 집에서 나간 지 얼마 안 돼서 둘째가 전화를 했다.
"엄마, 흰둥이가 풀려서 돌아다니고 있어."
"불러봤어?"
"응, 차 멈추니까 옆에 왔는데 부르니까 멀리 가버려. 엄마가 얼른 와서 어떻게 해봐. 아빠는 그냥 간대"
그렇잖아도 물과 사료를 챙겨서 가보려고 했던 참이다.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어버리면 어떡하냐고 큰애는 걱정이 태산이다. 산책을 하던 개라면 집 주변을 익숙한 냄새로 찾을 텐데, 그렇더라도 신호등 몇 개만 건너버리면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되고 길을 잃어버리기 쉬운데... 묶여만 있던 개라서 너무 좋아서 정신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쉽게 길을 잃는 건 아닌지...
흰둥이네 공장 쪽 담을 따라 차도 옆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나와 큰딸을 발견한 녀석이 신나게 뛰어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흰둥아!" 부르며 손을 뻗자 몸을 휙 돌려 달아났다. 오라는 손짓을 해도 멀찌감치 서서 쳐다볼 뿐이었다. "먹을 것을 놔두면 올지도 몰라."
어제 밥그릇에서 말라가고 있던 빨간 밥덩어리들이 땅바닥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빈 물그릇에 보온병에 담아 간 물을 부어놓고 밥그릇에 사료를 부어놨다. 집에 있는 작은 강아지가 3일 동안 먹을 분량이다.
1월 21일, 밤 11시.
다시 흰둥이를 살피러 나갔다.
가로등이 대낮처럼 환하게 켜져 있지만 인적이 없는 좁은 도로가의 공장들을 지나쳐서 걷기에는 적잖이 망설임이 있었다.
"엄마, 걱정하느라 잠 못 잘 거잖아. 그냥 나갔다 오자!"
큰딸과 함께 다시 집을 나서게 된 이유는 11시가 거의 다 되어서야 고모집에서 돌아온 둘째의 이야기를 들어서이다.
나와 큰애가 저녁에 사료와 물을 주고 나올 때 공장 뒷문 쪽 (흰둥이가 지내는 구석진 자리가 있는 ) 담과 담 사이의 자바라식 철제 울타리를 잡아당겨서 1미터쯤 공간을 열어두었었다.
보통 저녁시간 이후엔 그 정도만 열려있는 것을 보았고 그 정도 열어두면 흰둥이가 돌아다니다가 제 집으로 들어갈 수 있겠다 싶어 열어 둔 것이다. 사실 처음엔 줄이 풀린 흰둥이를 간식으로 유인해서 안쪽에 가두고 울타리를 완전히 닫아두려고 했지만 흰둥이가 가까이 오지 않아서그렇게 했다.
그런데 둘째 이야기로는 흰둥이가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기에 차를 가까이 대고 보니 울타리가 끝까지 닫혀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구나 싶어서 차에서 내려 무거운 철제 울타리를 낑낑대며 열어두었는데 (흰둥이 몸이 딱 들어갈 만큼만) 흰둥이는 또 멀리 달아나버렸다고 했다.
밤 11시에 큰딸과 둘이서 다시 흰둥이에게 갔더니 개집 주변은 휑하니 찬바람만 불고 있고 철제 울타리는 둘째가 다시 열어놓은 공간만큼 열려 있었다. 혹시나 땅이 경사져서 저절로 닫혔던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며 확인하러 나가자고 했던 큰애가 온 힘을 다해 울타리를 더 벌려놓았다.
밥그릇엔 내가 두고 간 사료가 그대로 있고 물은 어느새 얼어가고 있었다. 아직은 꽁꽁 얼기 전인 물그릇을 비우고 다시 새 물을 부어놓았다. 다시 얼기 전에 흰둥이가 와서 조금이라도 먹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추위에 그나마 지붕이 있고 담벼락이 바람을 막아 줄 집에 흰둥이가 들어가 자길 바라며 도로를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흰둥이가 우릴 보고 달려왔다.
이번에는 너무 반가워하며 폴짝거리면서 우리를 따라왔다.
"가! 집으로 가 어서!"
손을 내저으며 집 방향을 가리키니 손에 뭐라도 있는 줄 아는지 쳐다보며 점프했다.
제 집 쪽으로 발길을 돌려 걸으니 따라오지 않고 멀뚱히 쳐다보는 흰둥이를 나도 쳐다보고 서 있다가 다시 우리 집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자 녀석이 껑충거리며 따라왔다.
"큰일이네. 이러다 집까지 따라오면 어떡하냐?"
"그러게. 주차장에 차들 쌩쌩 다니는데 어떡해? 주민들 큰 개 보면 난리 날 텐데."
한밤중에 인적 없는 도로에 계속 서있을 수도 없던 우리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차를 피하기도 했는데 계속 따라오며 담벼락 주변을 킁킁대면서도 우리를 흘끗흘끗 쳐다보는 흰둥이 때문에 난감했다.
그러다 주차장 입구 바로 옆에 경사진 길에 위치한 사유지의 철문 밑으로 흰둥이가 뛰어 들어가자 우린 잽싸게 주차장옆 옥외 엘리베이터 쪽 계단으로 올라갔다. 흰둥이는 사유지의 넓은 공터를 탐색 중이었고 발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뛰어가는 우리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 녀석 그래도 멀리 가지 않고 제 집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걸 보니 오늘 밤에 멀리 가진 않겠다. 집에 들어가서 자겠지. 내일 가서 확인해 보자."
신나게 돌아다니다 털에 여기저기 풀씨를 붙이고는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는 흰둥이. 한동안 계속 나를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