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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 리브로 Jan 26. 2023

화려한 외출의 결말

우리 동네 흰둥이 4

1월 22일, 설날

시아버님께 가는 길에 흰둥이네 집 앞을 지나치며 살폈다.

집안에서 자고 있던 녀석이 잽싸게 집밖으로 나왔다.

"속도 더 줄이지 말고 그냥 가요, 우리 보고 따라오면 안 되니까..."

딸들이 "흰둥..."하고 부르며 창문을 내리려다 말았다.

여전히 줄이 풀린 채로 울타리 옆에 서서 두리번거리던 흰둥이가 멀어지는 우리 차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밤새 멀리 가지 않고 집에 들어가서 잤나 보다. 다행이다.


차 안에서 남편과 애들과 나는 흰둥이를 다시 붙잡아서 쇠줄에 묶어 놓아야 할지 말지 의견이 분분했다.

나와 남편의 의견은 이랬다. 묶어두려고 하는 줄 알고  더 멀리 도망쳐 버리면 어떡하냐,  자유롭게 신나게 돌아다니는 게 얼마나 좋겠냐, 주인한테 잡힐  때 잡히더라도 우선은 자유를 만끽하게 하자.

딸들은 생각이 달랐다. 묶여있는 것보다 밝은 표정이 정말 좋다. 하지만 차에 다칠까 무섭고 멀리까지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거나 나쁜 맘먹고 누가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이니 그냥 안전하게 묶어 놓자.


설날 오후...

시댁에 갔다가 다른 친척집에도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낮에 했던 얘기가 다시 반복되었다.

흰둥이에게 자유를 주자. 아니다, 연휴 동안 무슨 일이 날지 모른다. 그럼 일단 집에 들어가서 우리 강아지들 산책부터 시키고 더 고민해 보자.

드디어 집 근처 흰둥이네까지 왔고 커브길에서 차의 속도를 늦추고 지나가면서 우리 가족 네 명의 시선이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향했는데...

"엥? 뭐냐 저건?"

흰둥이가 쇠사슬 줄에 묶인 채 팽팽하게 줄을 당기고 서서 우릴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뭐야? 벌써 붙잡혔어?"

"명절인데 누가 공장에 나왔대?"

"주인이 왔다 갔나?"

"다행인 것 같으면서도 불쌍하네..."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헷갈리지만 우리의 고민을 한방에 날려버린 상황 종료에 웃프다는 말이 딱 어울렸다. 멀어져 가는  우리 차를 계속 쳐다보는 녀석의 시무룩한 표정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해가 진 후에 큰딸과 함께 흰둥이에게 갔다. 월남쌈을 해 먹고 남은 훈제 닭고기 살을 챙겨서 물과 함께 줬다.

"겨우 하루 만에 잡히냐, 이 녀석아?"

얼굴이며 가슴, 팔다리의 털에는 풀씨를 덕지덕지 묻힌 채 좋다고 헤벌쭉 입을 벌리고 엉덩이를 흔드는 녀석.

"어? 그런데 저기 엉덩이에 붙은 게 뭐지?"

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딸이 소리를 지른다.

"꺄악! 진드기 아냐?"

"설마... 이 추운 겨울에?"

"엄마가 만져봐! 떼어지는지..."

아! 징그럽다. 내 엄지 손가락 절반만 한 크기의 짙은 갈색의 뭔가가 2개. 꼬리 바로 위쪽으로 엉덩이에 딱 붙어 있다.

진드기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소름이 돋지만 흰둥이의 살을 파고들어 피를 빨고 병을 옮길 수 있다고 생각하니 어떻게든 떼어내야만 한다.

털장갑을 끼고 그 위에 비닐장갑까지 끼고서 흰둥이의 엉덩이 털을 움켜쥐었다. 순간 딱딱한 느낌의 그것의 촉감에 소름이 확 돋는데 눈을 질끈 감고 잡아당겨 보았다.

"깨갱!"하고 흰둥이가 몸을 휙 돌려버린다.

그 정체불명의 것이 너무 단단히 붙어 있어서 떼어 낼 수가 없었다.

흰둥이를 쓰다듬어 주면서 슬쩍 다시 시도해 보았지만 어찌나 단단히 붙어있는지 억지로 떼다가는 피부가 찢길 것 같았고 그럴 용기도 없었다.

걱정만 한가득 안고 일단 집으로 철수했다.




1월 23일, 연휴 셋째 날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길에 흰둥이 쪽을 보았다. 어떤 남자분이 밥을  챙겨주는 듯 등을 구부리고 고개를 무릎까지 수그린 채 뭔가를 하고 있고 개집에서 나와 서있는 흰둥이의 몸은 남자의 뒤쪽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흰둥이는 지나가는 나의 차를 못 봤다.

주인이든 직원이든 누군가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 걸 보니 다행이다 싶고 사실은 흰둥이가 그렇게 불쌍한 처지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물론 누군가가 돌보고 있었겠지만 눈으로 직접 보니 느낌이 달랐다.

그동안 내가 너무 감상적이었던 것일까? 너무 감정이입한 것이겠지...


친구를 만나고 들어오는 길에 다른 방향으로 돌아서 올까도 생각했다. 매일 들여다보고 이것저것 신경 쓰는 나의 행동들이 흰둥이에게 과연 좋은 건지도 모르겠고 흰둥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편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생각과 다르게 손은 늘 다니던 길로 핸들을 틀고 말았다.

다시 본 흰둥이는 제 집 안에서 누운 채로 고개만 살짝 들어 내 차를  보더니 몸을 일으키려 한다. 무표정한 얼굴에 잠깐 기대감이 스치는 눈빛을 애써 무시하며 지나갔다.


저녁이 되자 눈이 내리고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저녁밥을 먹고 나서 둘째가 말했다.

"엄마, 오늘은 흰둥이 보러 안 가?"

"신경 좀 꺼야 하지 않을까?"

"에이, 갈 거면서. 물 안 줘도 되겠어?"

"그치? 물이 꽁꽁 얼었겠지?"

나는 바로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고 소고기 미역국에  밥을 말아 그릇에 담았다. 사료와 개껌도 챙겨서 둘째와 함께 흰둥이를 보러 갔다.

개밥 그릇 안에 쌓인 눈을 걷어내려고 손을 넣고 보니 사료가 눈에 덮여 있었다.

"어? 사료네? 내가 준 것은 어제 다 먹었는데... 누가 챙겨주고 갔구나. 오전에 본 그 아저씨가 줬나 보다."

오전에 준 것인지 저녁에 새로 준 것인지 알 수는 없으니 그냥 내가 가져간 미역국에 만 밥을 사료 위에 부어 주었더니 흰둥이는 허겁지겁 잘 먹었다.

딸이 흰둥이의 엉덩이를 보더니 "딱 봐도 진드기네!"라고 말했다.


1월 24일, 연휴 마지막 날

그놈의 진드기인지 뭔지를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드기 제거 방법을 검색해 보니 억지로 잡아떼다가 피부가 뜯기고 감염이 되는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핀셋으로 잡고 들어 올려서 가위로 자를까? 그런데 터뜨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계핏가루를 물에 타서 뿌리면 진드기가 떨어진다는 글을 읽고는 그중 가장 시도해 보기 좋겠다 싶었다. 여름에 산책할 때 진드기 퇴치용으로 만들어 놓은 계피용액(계피를 소독용 알코올에 우려 놓은 것)이 있어서 가지고 나갔다.


나를 보자마자 좋아서 폴짝거리는 흰둥이를 쓰다듬으며 엉덩이에 계피용액을 분사했더니 녀석이 이리저리 몸을 피하며 눈치를 봤다. 밥그릇에 넣어준 닭고기를 먹는 동안 계피용액을 조금씩 흘려서 털과 갈색의 이물질이 흠뻑 젖게 했다. 조금 있다가 털을 쓰다듬는 척하며 움켜쥐고는 잡아챘더니 그것이 떨어져 손바닥 안에서 뭉툭하고 꺼칠한 덩어리가 느껴졌다.

"아아악!" 소리 지르며 바닥에 던져버린 그것을 확인하러 몇 발자국 다가갔다.

"응? 진드기 모양은 아닌 것 같은데?"

딸은 징그럽다며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고 "그럼 뭐야?"라고 물었다.

"도깨비풀 같은 것 아닐까?"

사실 난 도깨비풀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시골에서 자라지도 않았고 야생의 풀도 거의 아는 것이 없다.

바닥에 떨어진 그 정체불명의 것이 생긴 모양을 보니 딱 그 이름이 떠오른 것일 뿐...

진드기가 아니라는 확신에 가까운 느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손으로 다시 만지기가 쉽지 않았다. 나머지 한 개는 더 꽉 붙어 있어서 계피용액을 한 번 더 붓고 기다렸다가 떼었다. 털에 엉켜있던 꼬불거리는 수많은 털인지 가시인지 하는 것들이 수분을 머금고 펴져서 떼어낼 수 있었나 보다.

그 요상한 것이 다른 데 또 붙어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고 여기저기 붙어있는 풀씨들을 떼어줬다.

"뭐가 됐든 다행이다. 걱정 하나는 덜었네! 그런데 너무 춥겠다..."

헌 옷을 개집에 깔아주고 왔다. 지난번에 깔아 준 무릎담요를 처음엔 꺼내서 물고 흔들더니 다음날 보니 깔고 누워있었는데 너무 작고 얇아서 또 그게 신경이 쓰였다. (이 정도면 병이 아닌가??)

 

눈보라를 맞으며 발이 눈 속에 푹푹 빠지는 한적한 도로를 딸과 함께 걸으면서, "누가 보면 '참 별 짓 다하고 다닌다!' 하겠네"라는 소리가 한숨과 함께 나왔다.

"정을 끊어야 해. 적당히 해야지, 이게  뭔 짓이람..."

"참나... 또 갈 거면서 엄마는 뭘 그렇게 구시렁거림?"




'진드기 닮은 식물'이라고 검색어에 입력해 보았다.

'아주까리'의 이미지가 화면에 가득 나왔다. '피마자유'라고 들어본 적 있는 기름이 바로 아주까리 씨앗의 기름이라고 한다. 공업용, 약용으로도 쓰이는 피마자유의 효능을 알리는 글과 광고도 많다. 탈모에 효과가 좋다는 상품평을 보고 남편은 바로 주문을 요청했다. 하여간, 흰둥이는 가까이 가서 보지도 않고 진드기가 확실하다고 큰소리친 사람이...


피마자 열매의 모습. 흰둥이 몸에서 뗀 것이 갈색의 열매를 닮아 보였다.

나흘간의 연휴가 끝나고 수요일 아침에 출근을 했다. 밤새 내린 눈으로 도로가 미끄럽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고 날씨 탓에 학생들이 몇 명이나 출석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어서 휴강해 버릴까 하는 고민을 잠깐 했으나 어쩌면 수업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몇몇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라 출근을 하기로 했다.

다행히 아직 길은 얼지 않았고 부드러운 눈이 쌓인 정도라서 속도만 조금 줄이면 됐고 나의 우려와는 달리 첫 시간에 1, 2학년 아이들이 많지는 않으나 모두 나와 주었다. 방학인 데다 긴 연휴 끝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9시에 시작하는 방과후 수업을 듣겠다고 학교에 나온 아이들이 어찌나 기특한지... 날씨를 핑계로 더 놀고 싶은 건 나뿐이었나 싶어 괜스레 미안해지는 마음이었다.

3, 4학년 수업을 하다가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흰둥이 이야기를 간략하게 해 주었다. 몇몇 아이들이 "그거 도꼬마리 아니에요?"라고 말하는데 난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피마자 같던데? 혹시 그게 같은 걸 부르는 말일까?"라는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이들은 피마자를 몰랐다.

흰둥이 몸에 붙었던 그 무언가를 화이트보드 위에 검은색 마커로 그리자마자 아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도꼬마리! 그거 도꼬마리예요!"

"음... 하긴 피마자 사진과 내가 그린 그림이 같진 않아. 내가 본 것은 럭비공처럼 길쭉하더라. 나중에 검색해 봐야겠다. 그런데 니들은 그걸 어떻게 아니?"

"과학 수업시간에 배웠어요. 머리카락에 붙여보기도 했는걸요!"

애들은 도꼬마리 얘기에 신이 나서 한참을 왁자지껄 떠들었다.

 

영어 수업이 다 끝나고 나서 '도꼬마리'를 검색해 보았다.

세상에! 딱 이거네!

흰둥이의 엉덩이 털에 붙었던 것이 피마자가 아니라 도꼬마리였던 것이다.

다음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니, 1948년 스위스의 발명가가 도꼬마리 열매의 갈고리 모양의 가시를 보고 '벨크로'를 발명했다고 한다.

도꼬마리는 '창이자'라고 불리며 염증에 효능이 탁월해서 호흡기 질환, 만성비염, 좌골신경통 등의 치료를 위해 한약재로도 쓰인단다.


다양한 효능이 있다는 도꼬마리 열매. 옛날부터 도깨비풀, 도깨비방망이로 불렀다고 한다

흰둥이 덕분에 피마자를 알게 되고 초등학생 아이들을 통해 도꼬마리를 알게 되니 평생 공부라는 말을 또 실감하게 된다. 50년 이상을 살았어도 나의 경험 수준은 보잘것없으니 더 겸손하게 더 많이 배우려는 자세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흰둥이의 단 하룻밤 외출 덕분에 나의 연휴가 알차게 지나간 셈인데 흰둥이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달콤했던 자유의 맛을 못 잊고 그리워하고 있는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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