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마치고 퇴근하는 나에게 복도에서 마주친 처음 보는 남학생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90도 각도로 굽히며 인사를 했다, "사랑합니다..."라고.
"어? 어어... 안녀엉..."하고 나는 어색하게 대답하며 한 스텝 걸음을 멈추었다가 다시 앞으로 걸어가며 슬쩍 남학생을 돌아봤다. 시커먼 패딩 주머니에 다시 양손을 집어넣고는 세상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는 키가 나보다 더 큰 남학생의 좀 전의 묵직한 목소리가 귀에 생생하다. 6학년이거나 성숙한 5학년쯤 되겠지.
여전히 이 학교의 인사법은 생소하고 어색하다.
지난가을 처음 면접을 보러 왔던 날, 1~2학년쯤 되어 보이는 서너 명의 작은 아이들이 우당탕 복도에서 뛰어다니다가 나와 부딪힐 뻔했을 때도 실내화 바닥에서 '끼익' 소리가 나도록 급정지를 하며 허리를 폴더처럼 접더니 목청을 돋아 합창을 했었다. "사랑합니다!"
'이건 뭐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안녕! 얘들아 복도에서 뛰지 마, 위험하잖아?"라고 말하는 나에게 "네~~~"라고 큰 목소리로 외치며 아이들은 복도의 반대쪽 끝으로 달려 나갔다.
복도나 운동장에서 마주치는 아이들마다 "사랑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어떤 아이들은 밝고 경쾌하게, 어떤 아이들은 저음의 목소리로 점잖게, 또 어떤 아이들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마지못해서...
그때마다 난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못하고 "안녕?"이라고 대답했다. 속으로는 '참 희한한 인사가 다 있네...'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건 몇 달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다.
대중매체에서 아이돌 그룹이 팬들에게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하는 모습은 자주 봤다. 요즘은 '안녕하세요' 대신에 '사랑합니다'가 인사말로 굳어져버린 것 같다. 예전엔 팬미팅에서나 방청석의 관중들에게 하던 그 인사말을 지금은 연예 프로그램에 패널로 등장해서도 거침없이 사용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팬들이 자신이 열광하는 스타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팬들에게 연예인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런가 보다'하고 넘어간다. 나와 다른 세상 사람들이니 뭐 어쩌겠나...
그런데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상에게 난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나 순간 난감하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낯 선 이웃을 보고 우리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그 말을 하면서 "네, 저는 안녕합니다"라는 대답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의문문이지만 대답이 필요 없는 의례적인 인사말일 뿐이다. 상대방도 그냥 "안녕하세요?"라고 말하면 그뿐이고 굳이 모르는 사람들끼리 시선을 교환할 필요도 없다. 벽을 보거나 휴대폰을 보면서도 입으로는 "안녕하세요?"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안녕하세요?" 대신에 "사랑합니다!"라고 인사를 한다면...? 정말 이상하지 않을까?
나만 이상하게 느끼나? 아무튼 난 어색하고 난감할 것 같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사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정말 듣기에 이상하다.
몇 달 수업을 하고 나니 이제는 정이 든 아이들이 밝게 웃으며 "사랑합니다!"라고 인사를 할 때조차도 난 같은 말을 되돌려 주지 못하고 "Hi~~ Good morning!"이라고 대답한다. 만나서 하는 것도 어색한데 수업이 끝나고 교실을 나가면서도 "사랑합니다!"라니...
이 학교의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싶으신 것이겠지만 난 너무나 가볍고 쉽게, 또는 마지못해 사용하는 인사말로 남발하는 것에 불만이다. 내 마음이 꼬여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처음 '사랑'이라는 단어를 현실세계에서 들어본 것은 고등학교 입학식에서였다.
봄이지만 아직 겨울의 끝자락 추위가 살을 에는 듯 한 입학식날 운동장에 서서 교장 수녀님의 환영사를 듣고 있었다.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지던 첫마디는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정말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가 주는 비현실적인 감각과 함께 '하이틴 로맨스' 아니면 멜로 영화에서나 듣고 봤던 '사랑'이라는 단어를 난생처음 생생하게 들어본 것이다.
교장 수녀님의 길고 긴 환영사의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이라는 구절은 내 귀를 울리고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눈물이 핑 돌 만큼의 감동을 주었다. 나는 그날 바로 나의 학교를 사랑하게 돼버렸다.
치열한 입시경쟁에서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었던 (인성교육을 강조한다고 이름이 난) 학교에 배정되어서 울상이던 많은 동기들과 달리 나는 입학식날 진한 감동을 받았던 그 말,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 때문에 가슴 가득 희망과 행복감을 안고 고교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사랑에 목마른 아이였나 보다. 물론 고교시절은 내 일생 중 가장 질풍노도의 시기였지만 학교는 나에게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도무지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에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콩깍지가 단단히 씌워져 있었던 연애시절에도 그 말은 참으로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말이었다.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에도 "OO야, 엄마는 OO를 너무너무 사랑해~"라는 말을 해 본 일이 없다. 나에게는 그 말이 그렇게도 어렵다. 사랑하는데도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세상 쑥스럽고 닭살 돋는 것이다. 딸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면서 구연동화처럼 목소리를 꾸며가며 캐릭터가 하는 말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성인이 된 나의 아이들은 "엄마, 사랑해"라고 말하고 "사랑해~"라는 문자도 잘한다. 그럴 때 나는 "미투" 아니면 "나도~~"라고 말하거나 답장을 보낼 뿐 사랑한다고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고 그 글자를 쓰는 것도 어색하다. 요즘엔 그래도 아이들이 먼저 문자로 사랑한다고 하면 '나도 사랑해~'라고 쓰는 편이지만 주로 이모티콘을 사용할 때가 많다. 온갖 표정과 제스처를 보여주며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이모티콘이 많아서 정말 좋은 세상이다.
오래전에 아버지에게 쓴 이메일에 "아빠, 사랑해요."라고 끝인사말을 적은 것을 보았다. 내가 그런 글을 썼다는 것을 잊고 있었지만 오래된 편지함에 들어있는 그 편지는 나와 아버지가 주고받은 글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평생 하지 못했던 가슴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이야기를 처음 꺼낸 그날의 편지 속에서 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아버지로부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지만 나는 아버지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염려했는지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은 굳이 애써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아버지에게 직접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지만 끝내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래전에 아버지는 아셨을 것이다.
때로는 말하지 않으면 상대가 내 마음을 알지 못할 때도 있다.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그 마음...
그건 나의 마음에 진정성이 없어서가 아닐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사랑한다는 것을 알 수도 있고, 사랑한다고 말을 해도 전혀 사랑이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상대가 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내가 제대로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고 남편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우린 둘 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