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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Sep 03. 2023

"이렇게 좋은 줄 알았으면 진작에 요양원 들어올걸."

다가오는 아버지의 기일





거의 3년 전 일이다. 코로나가 그렇게 기승을 부리던 때 말이다.


한참 일을 하고 있는데 영상전화가 걸려 왔다. 아버지를 입원시킨 지인 간호사가 막간을 이용해 전화를 한 것이다. 아버지는 복날이라 닭백숙을 드시고 계셨다.


"S야 아부지 어제 잘 잤어. 이렇게 좋은 줄 알았으면 진작에 요양원 들어올걸.

요양원이 너무 좋아. 깨끗하고 밥도 제때 주고. 모두 다 도와주고."


"네 아버지 좋아 보이세요. 맛있게 드세요.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지금 그 간호사에게 얘기하세요. 준비해서 동생이랑 갈게요."


아버지랑 영상통화를 한 날은 코로나 인해 PCR검사 후 첫날은 무조건 1인실에 자야 하는데, 바로 그 담날이었다. 이제 정상으로 나왔으니 다인실로 옮기겠다고 지인 간호사가 말했다.

(좌:첫날 1인실에서 주무시고, 너무 좋다고 하시며 닭백숙 드시고 계신 아버지./우:코로나로 투명비닐에 가려 흐리게 보이는 마지막 면회모습.)


 2020년 9월 14일 아버지는 정확히 요양원에 들어가신 지 두 달 만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아버지가 그리웠다. 아무리 밤새 울부짖고, 한 밤중 자전거를 타고 낯선 길가에서 큰 소리로 보고 싶다고 고함질러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갑작스레 떠나셨다. 지인 간호사는 아버지가 딸 둘에게 짐이 된다고 빨리 죽게 해달라고 식사 전에 기도를 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결심하신 듯이 곡기를 거의 안 드셨다고도 했다. 아버지 기일이 다가오니 또 아버지생각이 나기 시작한다. 17일은 동생과 산소에 벌초하러 가기로 했다. 거기서 할머니도 뵙고 올 것이다.




살아 계셨을 때 임대 아파트 15층 꼭대기에 사셨다. 동생가족 4명 우리 가족 3명과 아버지께 갔다. 아버지는 향어회와 전어회를 좋아하셨다. 그리고 가끔 손주들을 생각해 짜장면과 탕수육, 치킨을 시켜서 같이 먹기도 했다. 12평 남짓한 그 방에 가족들이 안방에 앉으면 자리가 부족했으며 아이들도 점점 따라가지 않으려고 하는 걸 꼭 데리고 다녔었다. 동생은 나보다 애살 맞아 아버지에 대한 애증을 가슴에 안고서도 갈 때마다 아버지 좋아하는 호박죽, 곰국, 갖가지 반찬류를 조금씩 포장해서 냉장고에 넣었다. 드시는 방법까지 여러 번 일러주고 곰살스레 그렇게 아버지를 챙겼다. 그날도 가족이 아버지집에서 점심을 먹고 집안 청소까지 다 하고 나섰다. 지팡이도 없이 뒷짐을 지시고 1층 주자창까지 따라 나오셔서 차를 빼는 것을 지켜보곤 하셨다.


그날은 한사코 나오지 말라고 우리가 말렸다. 우리는 내려와 주차장을 떠나려고 하고 있었다. 아들이 갑자기 말했다.


"엄마. 외할아버지 좀 봐. 15층 베란다 창가에서 손을 흔들고 계셔."


우리는 같이 손을 흔들며 들어가시라고 했다. 길쭉하면서 좁은 영세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아들이 말하길,


"엄마. 할아버지 우리가 주차장에 있는 동안 계속 손 흔들고 계셨어. 모퉁이 돌아 안 보이기 직전까지도."


나는 말없이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렇게 우리를 아프게 하시더니 이제야... 결국은 혼자 남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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